파리에서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루브르에서 튈르리를 지나 오랑주리로, 오르세로 춤추듯 걸어 다녔다. 그렇게 미술관을 빙글빙글 춤추듯 돌다 나오면 늘 센강이 눈앞에 흘렀고 나는 강을 따라 또 걸었다. 강변에는 피부가 거친 노점상들(아마도 강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이 금고처럼 생긴 궤짝을 열어 고서적을 늘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호객(呼客)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지 그들은 거친 손으로 쥔 신문을 읽고 있거나, 난간에 기대 물끄러미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파리의 가을은 점점 깊어갔고, 하루하루 센강은 햇빛이 내리는 시간마다 물비늘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 위로 간간이 화분을 잔뜩 실은 유람선이 물길을 헤치며 지나갔고, 뱃전에 앉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물결에 섞여 들려왔다. 떠나온 곳이 문득 너무 그리웠다. 안경을 벗고 손차양 하듯 눈가를 문지르자 강가의 오래된 교회지붕 위로 새가 날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리 위로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파리 투어 2층버스가 기우뚱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다.
그날 오페라 가르니에 근처의 호텔 커피숍에서 김주은(39)씨를 만났다. 대구라는 지명이 나오자마자 대학(공예디자인학과)을 졸업하고 서울에서 디스플레이어로 일할 때 수성구의 백화점 매장에 일을 하러 갔었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수성못과 지산동, 범물동도 알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대구 이야기를 한참 했다. 2006년 파리 디즈니랜드 부티크의 콘셉터로 입사해 현재는 VMD(Visual Merchandising Displayer) 업무를 맡고 있다고 했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처음엔 매장의 제품 디자이너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콘셉터로 입사를 했어요. 그러다가 매장을 하나의 고부가 상품으로 만드는 일, 즉 콘셉트를 구체화시켜 이미지를 구축하는 비주얼 머천다이징 업무를 맡게 된 거죠. 쉽게 말하면 매장의 쇼윈도에서부터 내부 기둥 장식, 매장 구성, 마네킹 코디네이션, 외부조형물 설치 등의 기획에서부터 마무리 공사까지 모두 담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차분한 표정으로 얘기하던 그녀가 일 이야기가 나오자 음성이 높아졌다. 자신의 회사인 파리 디즈니랜드가 미국 본사의 지침에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파리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에 대해 열정적으로 강조했다.
파리 디즈니랜드는 1992년 세계에서 4번째 디즈니랜드로 문을 열었다. 공식 명칭은 '유로 디즈니 리조트 파리'이다. 파리시에서 동쪽으로 32㎞ 떨어진 마르메 라 바레에 있으며, 총 넓이는 파리 시가지 넓이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천778만5천123㎢다. 시설은 미국 디즈니랜드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메인 스트리트, 개척의 나라, 모험의 나라, 환상의 나라, 발견의 나라 등 5개 테마파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골프 코스와 테마호텔 6동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다. 최근 테마파크과 숙박시설 중간 지점에 야간 종합 공연장인 '디즈니 빌리지'가 문을 열었다.
일반의 기대와는 달리 개장 초기에는 비싼 입장료와 미국문화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반감, 와인(포도주) 판매금지 등에 대한 반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입장객 수도 적고 언론의 반응도 냉담했다고 한다. 그러나 개장한 지 10년이 지나면서 다른 디즈니랜드와 달리 와인 판매를 허용하는 등 사업부의 노력에 힘입어 2000년에는 한 해 1천540만명의 입장객수를 기록하였고, 현재는 더없이 성업 중이다. 작업할 때 테마와 프로젝트는 어떻게 기획하는지 물었다.
"파리는 세계의 유행을 주도하는 도시입니다. 미국 본사와는 별도로 우리는 해마다 해당 컨설팅회사에 용역을 주어 그해 유행할 것들을 미리 조사를 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초콜릿색 소품으로 트리를 장식하고, 디즈니 캐릭터를 모두 초콜릿으로 만들었던 것이 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국 본사에서도 놀랄 만큼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죠." 그러면서 말을 이어갔다. "저는 우리나라나 동양에 관한 것들에 늘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한국이라면 북한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매우 많습니다. 좌파 성향이 강해서일까요. 디즈니에서 만든 뮬란이라는 영화를 통해 일본이나 중국의 아름다움을 예찬했지만 정작 한국의 미(美)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참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래서 2008년 봄 프로젝트에 한국화의 여백의 미를 살리는 작업을 했었습니다. 빈 공간에 의자를 한국화적인 배치로 놓고, 난초 화분을 테이블 모퉁이에 두어 간결하고 정적인 면을 표현했죠. 이 작업으로 큰 호응을 얻어냈는데,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했어요."
시간이 꽤 흘러 우리는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맛이 유명한지 도로까지 줄지어 선 빵집을 지나고 여러 개의 카페도 지나 한 외진 골목으로 그녀는 나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좋은 구경을 해보지 않겠냐는 듯 눈을 찡긋하며 한국 식료품점으로 들어갔다. 단골이었던지 주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좁은 진열대에 산더미처럼 쌓인 한국 제품들 사이로 나를 잡아끌었다. 라면과 아이에게 줄 몇 개의 과자를 고르면서 그녀는 이런 푸념을 했다. "프랑스인들은 심지어 삼성이 일본 회사인 줄 알아요."
이른 저녁을 먹고 커피맛이 좋다는 카페로 갔다. 코냑이 든 커피를 그녀가 권했다. 저녁과 커피가 모두 특별하고 훌륭한 맛이라고 하자, 프랑스에서 전문직업인으로 살아남기에는 이런 감각도 중요하다며 농담처럼 말했다. "1998년 프랑스로 유학을 와서 5년 과정의 에콜에 3학년으로 편입을 했어요. 실내디자인과 무대장식을 전공했죠. 그때 처음으로 무대 장식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저는 한국의 다리를 형상화시켰어요. 그리고 이것은 한국의 전설 속 칠월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오작교이거나 속담 속 원수가 만나는 외나무다리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죠. 저는 단번에 그 해의 최고 학점을 받는 학생이 되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그녀는 지난 2004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돈키호테 발레공연에서 무대의상디자이너 제롬 카플링의 어시스던트로도 활약했다. "예술 계통의 일들이 모두 그러하겠지만, 무엇보다 이쪽은 더욱더 독창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이미지를 요구합니다. 특히 파리에서는 자신들 스스로도 프랑스가 낯설다는 말을 할 만큼 이질적인 통례와 관습, 그리고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곳에선 오히려 이방인이라는 것이 훨씬 더 강점을 지녔다고 할 수 있죠." 오랜만에 그녀가 보내온 이메일과 사진들 속에서 한복을 입힌 캐릭터들을 발견하고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김주은씨는 파리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가장 고부가(高附加)로 파는 사람이다.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김주은 약력
·1998년 소르본대학 어학과정 수료
·파리예술기술최상학교 실내인테리어, 무대장식과 수료
·2006년 파리 디즈니랜드 입사
·현재 VMD(Visual Merchandising Displayer)
·2004년 예술의 전당 돈키호테 발레공연 무대의상디자인 어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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