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유비무환

완전히 얼음판에 나자빠진 황소 눈깔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장모님의 49재 중 마지막 재를 모시려 소백산 중턱의 절로 가는 길이었다. 아침에 출발할 때만 해도 날씨가 비교적 포근했는데 어느 순간 가는 빗줄기를 뿌리기 시작하더니만, 기어코 진눈깨비가 내렸다. '수상한 시절의 변덕스러운 날씨이겠거니'하며 짐짓 태연한 척 차를 몰았지만, 채 반도 못 가서 뭔 도깨비의 조화인지 도대체 온통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흩뿌리는 눈비는 차창에 닿자마자 얼음덩이로 엉기어 붙어 졸지에 당달봉사 신세요, 길바닥은 얼음 도금이라도 한 양 마냥 앉은뱅이 용쓰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엉금엉금 기어들어간 휴게실 안으로는 온통 빙판이요, 출구는 이리저리 맞부딪쳐 널브러진 차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굽히지도 젖히지도 못하는 안팎곱사등이 신세로 한참을 꼼짝없이 묶여있을 수밖에는···.

평소 시원시원하면서도 여간 곰살갑지 않던 장모님의 마음씀씀이처럼, 장례식과 천도재를 지내는 내내 날씨는 신통방통하게도 평온하였다. 밤새 기승을 부리던 강추위도 상여가 나가는 아침이면 봄날처럼 눅어졌고, 귓불이 얼얼하도록 매섭던 골바람도 재를 마칠 즈음이면 어김없이 따사로운 햇살에 녹아들곤 했었다. 그러다가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이라 된불 맞은 황소마냥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일행 중에서 한쪽은 그만 추돌을 일으켰고, 다른 쪽도 구렁텅이에 빠져서 하마터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하였다. 체인까지 감고서 뒤따라 내려오던 우리 차도 덩달아 충돌을 일으킬 뻔한 위태로운 눈길이었다. '그러게 진작 살아생전에 좀 더 잘하지' 라는 고인의 노여움이 덜 풀리신 걸까? '오냐, 오냐'하며 곱게 봐주었더니만 정말 제 잘난 줄 알고 기고만장했던 철딱서니 없음에 따끔한 일침이라도 놓으신 걸까? 돌아오는 길 내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비가 오면 환자가 없다'라고 개원가에서 곧잘 하는 우스갯소리이다. 허나 사람살이가 그리 우스꽝스러운 것도 아니고, 늘 화창한 봄날일 수가 없다는 말씀이리라.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답시고 헛다리짚거나,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 쥐고서 궁상떨지는 말라는 것이다. 살다보면 두부 먹다 이 빠지기도 하고, 냉수도 불어 먹어야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단다. 한 푼이라도 여윳돈이 있을 때 그나마 궂은날을 대비할 수 있듯이, 건강도 있을 때 미리 미리 보살피고 챙기라는 백번 지당하신 말씀. 그걸 맹꽁이처럼 입으로만 외지 말고 온몸으로 겪고 깨우치라는 마지막 유언이자, 위대한 유산이었으리라.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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