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정조의 비밀 편지

후기 조선 때 개혁정치를 주도한 正祖(정조) 임금이 실제로는 정치 9단의 실력으로 주도면밀하게 막후정치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는 정조가 최고 政敵(정적)이자 노론 벽파의 수장으로 당시 영의정이던 沈煥之(심환지)에게 보낸 299통의 비밀 御札帖(어찰첩)에서 밝혀졌다.

어찰첩에는 굳건하고 英明(영명)한 품성의 聖君(성군)이라는 정조의 기존 이미지와는 달리 여러 신하를 깎아내리는 暴言(폭언)들이 섞여 있다. 오랫동안 口傳(구전)돼 마치 사실인 것처럼 여겨진 '심환지에 의한 정조 독살설'을 뒤집을 만한 증거도 있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여느 士大夫(사대부)에 못지 않은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학문을 사랑한 정조조차 뒤편에서는 정적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환심을 사려는 것은 아니겠지만 심환지 큰아들의 과거낙방을 위로하면서 '300등 안에만 들었으면 합격시키려고 했다'고 썼다. 또 자신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상소문을 짓게 하고 그 字句(자구)까지 일러주어 신하의 말을 잘 듣는 왕의 모습을 연출했다. 결국 이 둘은 외견상 정적이었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가까운 정치적 同志(동지)였을 뿐 아니라 인간적인 親友(친우)였던 셈이다.

또 하나, 정조는 이러한 私信(사신)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 심환지에게 끊임없이 없애라고 했다. 그러나 심환지는 이를 보존함은 물론 받은 날짜와 장소까지 남겼다. 역사 속의 事實(사실)은 절대권력의 군주도 막지 못한 셈이다.

이 비밀 어찰첩이 공개되면서 정조에 대한 존경심이 한 풀 꺾여진 것 같아 씁쓸하다. 한편으로는 요즘 정치판이 떠올라 대통령이나 與野(여야) 할 것 없이 200여 년 전의 정조와 심환지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치적 라이벌 간에 주도권을 잡으려는 다툼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根幹(근간)인 국리민복이 위기를 맞은 때에, 사사건건 밀어붙이기와 뒤틀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정치 본연의 자세가 아니다. 지금의 경제상황이 國難(국난)에 버금가는 총체적 위기상황인 만큼 으르렁거리며 마주한 얼굴을 이제는 국민 쪽으로 돌려야 한다. 정조와 심환지처럼은 아니어도 서로 손을 잡고 다수 국민의 바람이 무엇인지를 철저하게 살피라는 얘기다.

정지화 논설위원 akfmcp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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