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채널돋보기] KBS스페셜 '을지로, 겨울이야기'

'누구나 노숙자가 될 수 있다.'

을지로 입구역 지하광장, 무심히 스쳐가는 사람들 뒤로 100여 명의 노숙자들이 있다. 사회와 격리된 채 추위와 배고픔에 떠는 노숙자들은 말이 없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한창인 서울의 뒷골목, 힘겨운 삶을 연명하는 이들을 찾았다. KBS스페셜팀은 지난해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시작으로 50일 간 노숙자들의 삶을 영상에 담았다. 을지로 지하광장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한 식구와 함께 기구한 사연을 가진 수많은 노숙자를 통해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려냈다.

을지로 입구역 지하광장에서 생활하는 노숙자들에겐 '규칙'이 있다. 매일 새벽 첫 지하철이 다니기 전까지 잠자리를 정리하고 광장을 깨끗이 치워야 한다. 먹고 난 음식 쓰레기는 말끔히 치워야 하고 절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 안 된다. 또 다른 노숙인과 일반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도 금물이다. 일반인들에겐 공공장소지만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침묵으로 일관했던 그들은 촬영이 진행되면서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노숙자였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농사일을 하다 진 빚 때문에 노숙자 생활을 하는 성복 씨와 중식 조리장이었다 노숙자 신세가 된 한 중년남자, 말을 할 줄 모르는 한 노인 등 서럽고 슬픈 사연은 그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아들, 남편, 형제였던 그들의 가족내 위치와 관계는 노숙자가 되면서 산산히 부서졌다.

가족을 일구며 당당한 사회인으로 살았던 따스했던 기억과 함께 이들을 괴롭히는 것은 사회의 냉대와 멸시다. 어렵게 구한 돈으로 허기를 채워보려 하지만 그들은 허름한 옷차림으로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선, 삶의 공허함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인간 이하의 취급이다.

을지로엔 두개의 시간이 공존한다. 크리스마스와 새해 분위기로 들뜬 서울의 풍경과 함께 사회와 단절된 채 지하에 격리된 노숙자. 배고픔과 외로움에 지쳐가는 그들의 모습에선 '누구나 노숙자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현실의 냉혹함이 밀려든다. 정현미기자 bor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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