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화를 신고 모자를 챙겨 햇살 아래로 나선다. 긴 겨울 동안 게으름에 빠져 있던 몸을 채근해 현관을 나서기가 쉽지 않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강둑을 걸어 포도밭과 자투리 밭들이 붙어있는 철로변을 지난다. 일찌감치 퇴비를 한 포도밭에는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나는 양지바른 무덤이 있는 쪽으로 길을 잡는다. 낡은 냉장고며 TV 수상기, 부서진 탁자들이 버려져 있는 후미진 산자락을 통과하면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무덤이 나온다. 이곳은 서성거리거나 무얼 조용히 생각하기에 알맞은 곳이다. 안면 많은 무덤 곁에 잠시 누워서 따뜻해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봄이 오려는지 옅은 구름이 떠가고 산비둘기 한 마리가 소나무 끝에서 날아오른다.
덤불을 헤치며 천천히 겨울 숲으로 들어선다. 빽빽한 소나무와 우거진 잡목들 아래 작은 바위 틈마다 죄를 숨긴 듯 숲은 어둡고 아늑하다. 키 큰 나무들은 기둥처럼 줄지어 서서 컴컴한 이 사원을 떠받치며 대기 속에 고요히 잠겨 있다. 숲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나는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
간간이 묵묘들이 보인다. 떡갈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납작해진 봉분들, 무너지지 않고 있는 돌 축대로 미루어 이곳이 한때는 잘 가꿔졌던 무덤이었음을 짐작한다. 덤불 속에서 한 무리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다 날아간다. 나는 마른 잎사귀들이 사운대는 소리를 음미하며 굴참나무의 우툴두툴한 껍질을 어루만지며 간다. 까맣고 동글동글한 똥과 멧돼지가 파놓은 듯한 흙더미를 살피고,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수북하게 떨어져 있는 깃털 앞에 멈춰 서선 푸드덕거렸을 새의 몸부림과 피 냄새, 사냥감을 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짐승의 자취를 떠올린다.
숨이 차오르고 산이 점점 깊어질수록 나는 숲의 의지에 따라 순수해지고 작아진다. 시간과 공간, 모든 관계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가장 선하고 본질적인 모습으로 돌아온다. 바람에 흔들리는 마른 잎사귀와 나뭇가지들은 자연의 시계가 되고, 나는 두근거리는 숲의 박동에 내 심장 박동을 덧보탠다. 세상과 다른 차원을 이루고 있는 이 숲의 시간에 걸음을 맡기고 실려가다 보면, 몸속으로 속속들이 파고드는 은근한 기쁨이 있다. 어느새 헝클어졌던 마음이 사라지고 나는 온몸으로 자연의 몸을 흡수한다.
죽은 사람의 영을 받아 깊어진 나무의 영혼들이 내 영혼을 감싸고, 숲의 기운이 나를 에워싸, 태초의 집 같은 골짜기, 아무도 이름 붙여주지 않은 이 골짜기에서 나는 양수 속을 떠다니는 듯 평화를 느낀다.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돌아와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으로 회복된다. 이 숲에서는 세상의 온갖 기준과 척도들을 버리고 가장 순전한 마음을 따라 생각하고 행동한다. 이렇게 걷다 보면 몸 깊은 곳에서 창조의 섭리를 찬양하는 노래가 저절로 우러나온다. 큰 소리로 노래 부르거나 춤을 추어도 이곳엔 뭐라 하거나 이상하게 쳐다볼 사람이 없다.
존 무어는 산에서 보낸 하루가 몇 수레의 책보다 낫다고 했다. 산에서는 누구나 순례자가 되고 선한 사람이 된다. 뿌리 깊은 나무들 사이에서 숨을 몰아쉬며 무한한 우주 속에 한갓 피조물인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된다. 산이 가지는 큰 힘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정화작용이 아닐까. 영감과 조화, 경이로 가득 차 있는 숲속에서 거칠고 무뎌졌던 감성은 어느새 다시 살아나 어떤 떨림을 감지하게 되고, 복잡한 관계망 속에 얽혀 격앙되어 있던 심정은 서서히 진정된다. 실로 오랜만에 묵은 슬픔과 걱정거리들이 가지런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자연 속을 걷는 일은 어떤 종합비타민제보다 더 활력과 생기를 주는 생의 촉진제가 된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숲의 입구를 닫아 놓고 철로를 넘고 남천을 건너 아파트로 돌아온다. 한 며칠 숲의 기운으로 잘 버텨나갈 것이다. 봄이다, 걷자. 걷고 걸으면서 허전한 몸과 마음에 희망을 충전하자.
서영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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