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유령의사

'유령의사'라는 말이 있다. 더 정확히 '유령 외과의사(ghost surgeon)'라는 말인데 조금은 익살스런 표현이다. 이 말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수술실 풍경을 먼저 스케치해 보자.

일반적인 경우 수술은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간단한 수술은 간호사 한 명만으로도 되겠지만 조금 큰 수술은 다른 의사도 도와야 한다. 거기에다 마취가 필요하면 마취과 의사와 마취 간호사도 있어야 하고 수술 간호사를 도와주는 순환 간호사도 있어야 한다. 규모가 더 큰 수술은 수술을 주도하는 의사(집도의)를 도와주는 의사도 두 셋은 된다.

일단 이 정도(7~8명)까지가 소위 말하는 '수술 팀'이 되는데 그렇다고 수술팀만이 수술실 안의 전부는 아니다. 대학병원에는 뒤에 서서 수술팀의 어깨너머로 열심히 관찰하는 예비 의사, 예비 간호사 등의 관중이 있다. 수술이 시작되기 전에 환자가 수술대에 눕자마자 준비해야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환자의 눈에는 수술복에 복면을 두른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달려든다. 어차피 수술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눈만 빠꼼히 보여 누가 누군지 분간도 안 되지만, 분간한다 하더라도 보통 거기에 집도의는 없는 수가 많다. 처음부터 집도의가 있다고 나쁠 것은 없지만 아무래도 준비하는 수술팀에게는 시어머니가 나설 차례도 아닌데 부엌에 계속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면 집도의는 언제 등장하는가?

보통은 환자가 마취되고 수술 준비가 완료된 시점에 등장을 한다. 그리고 수술이 끝나면 집도의가 먼저 퇴장하고 나머지 수술팀들이 마무리를 하고 나면 환자가 드디어 마취에서 깬다. 그래서 환자는 수술실에서 집도의를 볼 겨를이 없다 보니 집도의는 '유령'처럼 환자 몰래 왔다 가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유령의사'라는 용어 자체가 서양에서 온 것이니 서양의 경우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달에 수술실에 들어서니 환자는 이미 마취되어 있고 수술팀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사연인즉 환자분이 마취 전에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다가 내가 없으니 수술팀에게 정말 내가 수술을 하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고 한다. 수술팀이 확실히 그렇다고 다짐을 드려도 미심쩍은지 사진이나 동영상이라도 좀 찍어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런 경우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수술팀은 '참 별난 분도 계시다'고 했겠지만 내가 바로 그 '유령의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동영상을 촬영해서 저녁 회진 때 그 환자분께 보여드렸더니 오히려 놀라고 겸연쩍어 했는데 만일 못 보았다면 평생 궁금했을 것이다.

도처에 CC TV가 있고 휴대전화로 사진과 동영상이 가능한 시대니 이젠 유령이란 말은 사라질 때도 되었다. 그렇더라도 병원과 수술을 핑계대고 아내 몰래 술친구들과 있을 때 집에서 영상전화라도 걸려온다면, 그 순간만큼은 나는 '유령'이고 싶다.

정호영(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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