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보도연맹' 유가족 애끓는 사연 줄이어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첫 국가 배상 판결(본지 12일자 4면 보도)이 나온 이후 대구와 경북 보도연맹 유족회에는 유가족들의 애끓는 사연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유족회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줄이은 가슴 아픈 사연

노모(68·대구 북구 복현동)씨는 "지금껏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으나 며칠 전 매일신문 기사를 본 뒤, 전화를 주신 친척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경위를 알게 됐다"고 말문을 열었다. 노씨는 1950년 5월 17일 집을 나섰던 아버지가 수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그날에 맞춰 제사를 지내왔다. 노씨는 "어머니의 말로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을 준다고 해 친척 중 한 분이 아버지 이름으로 서명했고 때문에 가창골로 끌려간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며 "이제라도 선친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고 했다.

1950년 당시 일곱살이었던 장모(67·대구 수성구 수성3가)씨도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아버지를 가창골에서 잃었다고 했다. 장씨는 "일본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던 선친이 1946년 10·1 대구폭동 당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됐으며 1950년 8월 군인들에 의해 가창골로 끌려가 학살됐다"며 "1960년 4·19 이후 매일신문이 당시 대구형무소 수감자 명단을 밝혀내면서 그 명단 속에서 아버지 이름을 발견했다"고 했다.

강모(64·경북 김천 모암동)씨는 "매일신문 기사를 보고 김천시청으로 달려갔으나 김천지역에는 유족회가 아직 꾸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강씨는 네살 때던 1950년 6월 아버지가 경찰관들에 의해 연행돼 금릉군 구성면 무릉리 산골로 끌려갔으며 함께 연행됐던 80여명이 총살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골조차 찾지 못해 그 지역의 흙을 파다 가묘를 만들었다"며 "하루빨리 사건의 진상 조사가 이뤄져 빨갱이라는 누명과 한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이모(60·경북 영천 용전리)씨는 1951년 아버지를 잃고 그해 겨울 유복자로 태어났다. 이씨는 "당시 서른살이던 아버지가 이웃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을 말리다가 빨갱이로 몰려 경찰에 잡혀간 후 영천 3사관학교 인근 '말무덤' 동네 골짜기에서 수십명과 함께 총살됐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어머니가 남편 없이 세자녀를 키우는 것도 힘들었지만 '빨갱이 가족'이라고 멸시당하면서 정말 힘든 세월을 살았다"며 "이제라도 누명을 벗겨드려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제는 명예회복 되나

이광달 대구유족회 회장은 "하루 20여통의 문의전화가 걸려올 정도로 피해자들의 하소연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1960년대 국가 차원에서 진상 조사를 한 결과 대구 가창골 1만여명을 비롯해 대구경북에서만 모두 24만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전국적으로는 114만여명의 희생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금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 접수된 것은 1만여건에 불과하다.

이 회장은 "현재 50여명의 유족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위한 준비작업을 시작했다"며 "신문보도 이후 추가로 연락이 닿은 피해자들까지 모두 모아 소송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태준 경산유족회 회장은 "신문보도 이후 문의전화가 이어지고 있지만 2005년 진실화해위 관련법에 의해 이미 신고접수가 끝난 상황이어서 뒤늦게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난감하다"고 했다. 이 회장은 전국의 유족회들이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전반에 대한 배상을 골자로 하는 '배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국회에 촉구하는 방안과 유족회별로 개별 소송을 진행하는 방안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 현재 논의중이라고 전했다.

한윤조기자 cgdrea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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