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김형에게

봄 맞으려 지는 해가 남기고 간 홍홧빛 미련이 가슴을 적십니다. 서쪽 하늘에는 개밥바라기가 오늘도 투명한 빛을 내며 옅은 어둠 속으로 찾아듭니다. 이맘때면 진종일 집 앞 저수지를 오가며 자맥질에 여념 없던 오리들은 날개를 접고 숲 그늘로 숨어들고, 옅은 어둠이 내린 산 속은 깊은 평화로움이 계곡마다 스며듭니다.

해질녘 산 속의 평화로운 아름다움은 제 짧은 글로는 차마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저 아미타여래가 계신다는 서방 극락정토의 그 평화롭고 장엄한 아름다움이 아마 이런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행복에 젖을 따름입니다. 이런 평화로움이 낯선 분들은 가끔 제게 묻습니다. "이 산속에서 심심하지 않습니까?" 혹은 "인터넷도 없이 어떻게 지내세요?" 그럴 때 저는 그저 웃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께 제가 날마다 누리는 이 엄청난 호사를 설명드릴 수 있는 말재주는 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을 바라보면 삶은 참 찬란하고 장엄한 기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수백 광년이라는,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찾아온 저 수많은 별들을 보면, 어쩌면 넓디 넓은 저 우주의 또 다른 한쪽에는, 청도 산골짝에서 별을 세는 나를 보는, 어떤 아름다운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립니다. 밤하늘을 볼 때면 삶이란 걱정하고 치열하게 이루어야 하는 어떤 목적이 아니라, 그저 고맙고 즐기며 살아야만 하는 신비임을 느낍니다. 삶이란 계획할 수도,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을 안 뒤로는 조금은 느린 속도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내가 가진 것은 지금 이 자리뿐이라는 것을. 지금 내가 숨 쉬고 있으며 어깨 위에 한 조각 내리는 햇살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 것인지를.

기억하시지요. 고은 선생께서 지으신 '꽃자리'라는 아주 짧은, 그러나 더 없이 아름다운 시 말입니다.

'꽃자리니라

네가 그 토록 몸서리쳐하는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집 뒷산 온통 벗은 은사시나무를 볼 때마다 가지지 아니함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낍니다. 특히 오늘 밤처럼 그 빈 가지에 반쯤 저문 달 하나만 달랑 걸려 있는 은사시 숲의 정결함은 마음에 쌓인 욕심들을 털어내고 고치는 데 더없는 명약입니다.

김형,

틈 내어 한 번 찾아 주시지요. 세상 풍진들은 잠시 별빛 아래 뉘여 두고 뒷산 은사시나무에 걸린 달과 벗하여 하룻밤 취하는 정도의 호사라면 그리 흠될 것도 없겠지요.

박진우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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