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동일의 대학과 책] 혁명 운동의 실패(한국학술정보·2006)

대학생이 고민하는 만큼 사회는 진화한다

사회적 존재로서 대학생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고민의 수준'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뿌려대면서 '~로부터 자유'를 얻었다고 기고만장하는 것은 단 하루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복을 찢고 얻고자 한 '~로부터'의 자유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개인적 수준의 자유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개인적 자유에 대한 투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미 우리 사회는 모든 대학생들에게 무한한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대신 대학생이 되는 순간 개인적 자유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이 지워집니다.

그때부터 대학생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고민거리가 생깁니다. 사회는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가? 누가 사회의 주인이며, 사회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해 스스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것이 대학생이 짊어질 고민입니다. 젊은 대학생이 사회를 위해 고민하고, 그 고민을 풀어내는 지혜를 배워야만 사회는 발전하고 진화합니다. 불과 50년 만에 세계 강국의 반열에 오른 한국의 힘, 그 저변에는 젊은 학생들의 고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학과 동시에 대학생들이 당면해야 할 고민들을 쓴 책이 있습니다. 1980년대를 경험한 젊은 학자가 진솔하게 풀어낸 80년대 한국 사회, 한국 대학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창희 교수의 '혁명 운동의 실패'(한국학술정보, 2006)입니다. 대학에 입학하는 신입생뿐만 아니라 학부모 ,그리고 일반인들도 꼭 읽어보아야 할 책입니다.

서두에서 저자는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가 공유하고 있을 기억들을 이야기합니다. 1980년대 후반의 대학은 낭만과 학구열이 아닌 투쟁과 혁명의 열기로 점철되었던 시대입니다. 민중 권력의 시대, 자주 통일의 시대를 준비하고 선도해야 한다는 확신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일반 대중은 물론이거니와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혁명'에 무관심했습니다. 열정에 사로잡힌 소수를 제외하고는 '곁눈질'하듯 구경만 하던 관객이었습니다. 저자는 그러한 당시 사회가 당면했던 한계를 국가 폭력, 계급 관계, 헤게모니 관련 변수를 중심으로 비교정치학 일반 이론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존 연구 성과나 회고담과는 달리 운동의 전개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복잡한 사회과학을 평범한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었습니다.

책 내용에서 주안점을 두고 살펴보면 재미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 한 가지는 미국의 신좌파와 한국의 1980년대 좌파의 조직, 활동, 이념 등에 대한 서술과 분석들입니다. 지금까지 이들 운동에 대해서는 주로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내려지고 있습니다. 한 편은, 반공(反共)에 기초한 보수주의적 입장입니다. 이들은 운동을 순수성이나 의도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이 아닌 개인적인 환경과 심리적 충동에 따른 젊은 세대의 무모한 집단 행동이나 병리 현상의 일종이라고 단정합니다. 다른 한 편은, 민주화 운동에 기초한 진보주의적 입장입니다. 이들은 당시 학생 운동이 비록 실패한 운동이었지만 과거의 전통적 좌파나 기존 정치세력들과는 달리 역사적 진보를 성취하려 했던 희생과 투쟁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이창희 교수는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들의 섣부른 단정을 비판하고 객관성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좌우 간의 단순한 거리상의 중립이나 기계적 균형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들을 발굴하고, 이론적 분석틀을 적용하여 운동의 의미를 재조명하였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사건의 재발굴과 재구성 작업입니다. 미국 신좌파의 이념과 주장을 정부에 대한 저항, 사건들의 흐름, 정치사회적 반응과 여론의 추이들을 통해 생생하게 파헤쳤습니다. 동시에 한국의 1980년대 좌파 운동세력의 이념, 문화, 조직의 특징을 꼼꼼하게 관찰하면서 당시 사건들을 다룬 신문, 인터뷰 자료 등을 활용하여 시대를 재구성하였습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학생 운동'은 이미 지나가버린 진부한 경험의 한 토막 이야기라고 치부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주제로 삼은 '학생 운동'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근간에 깊이 뿌리박고 튼튼하게 살아있습니다. 때로는 노동 운동으로, 때로는 촛불 집회로 점화되어 매번 새로운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이창희 교수의 언급처럼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인간사회가 당면할 영원한 숙제일지 모릅니다. 정권 변화에 따라 한 가지 색깔로 일통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색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다양성은 사회 발전에 대한 고민이고 노력의 흔적입니다. '역사의 타는 불꽃에 한 개의 마른 장작이 되려 했던'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분명히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다양성이 대립자가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위해 '어울려'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노동일(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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