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미안해'라는 말의 가벼움

진정성 퇴색 립서비스로 전락, 과오 있었다면 보상까지 따라야

'미안해'나 '고마워' 같은 말들은 우리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윤활유와도 같은 중요한 단어들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말들을 자주 사용하면서 우리가 교양 있는 사람으로 한 발 더 가까워져가고 있다고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을 포함한 이른바 고등 교육을 잘 받아온 덕분일 것이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게 되는 이런 말들 가운데 '미안해'라는 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려 한다.

보통 우리는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부딪치게 되었을 때나 남의 발을 밟았을 때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저절로 하게 된다. 그리고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늦었거나 약속을 잊었을 때 역시 "미안해"라는 말로 사과를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한 사과로 끝나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미안해'라는 말의 의미 속에 한 발 더 깊이 들어서 보면 이 단어가 그리 간단한 말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오랫동안 잘 사귀어오던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를 자신의 사정으로 인해 더 이상 만날 수 없어 헤어지게 되면 그 사람에게 "미안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돌아서서 나온다. 이 순간에 우리는 가장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모해 버린다. 자신이 얼마나 미안한 짓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내가 앞으로는 너와 함께할 수 없게 되어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우리는 과연 마음속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하는 걸까?

우리의 이기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방어하는 수준에까지 그것을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와 버리는 더 독한 한마디, 이기심의 결정체를 내뱉는다.

"정말 미안해!"

그렇다. 미안함 뒤에 숨어있는 자신의 팽배해진 이기심을 감추기 위해서는 '정말'이라는 '정말 같지 않은 정말'이 아마도 꼭 필요했을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완전범죄를 눈 깜짝 안 하고서 순식간에 저지르게 되는 것 같다. 우리는 이런 익숙한 '미안한' 상황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가면서 살아왔을까.

우리 입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미안해'라는 말은 생각하면 할수록 함부로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에게 아직 그리 무거운 말로 사용되고 있지 않는 듯하다. 이제 '미안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을 좀 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미안할 일이 아예 없으면 좋겠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이 어쩔 수 없이 줄줄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미안해'라는 말만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될 것 같다. 마음으로 미안하다면 그 미안함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다. 러시아의 광고 문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랑한다면 증명해 봐!"

이 구절과 함께 보석 광고가 등장한다.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자신이 가장 아끼는 물질을 함께 써 보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광고이다.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까지 했지만 헤어지는 순간에는 위자료 한 푼을 아끼려고 법정에까지 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사랑했던 기억조차도 없다고 우리의 기억력을 비하할 것이 아니라 인정할 과거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순간에 우리는 뒷모습 역시 우리의 얼굴만큼이나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조금 더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우리가 '미안해'라는 말로 부족해서 '정말 미안해'라는 말을 남기고 얼른 돌아서서 나오고 싶은 그 순간에 우리는 그 미안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약간의 보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이 이미 떠나버린 곳에 무엇인들 투자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나마는 자신의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 타인에게, 그것도 지금까지 자신이 중요하게 여겨왔던 그 사람에게 환히 비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그려본다면 '미안해'라는 말 한마디로 때워버리기에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염치없게 여겨지지 않을까.

정 막 래 계명대 러시아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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