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vs 원균
임진왜란 초기만 해도 조선 수군을 대표하는 이순신과 원균은 둘도 없는 협력자로서 연합 함대를 이용, 옥포와 한산도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하지만 옥포해전 뒤 승전보고서를 올리지 않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이순신이 임금에게 승전보고를 올렸고, 다섯살이나 나이가 어린 이순신은 원균을 제치고 종2품에 오른다. 이에 격분한 원균은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이런 갈등은 개인적 문제를 떠나 전라 좌수영와 경상 우수영의 갈등으로 비화됐고, 급기야 비상시 자중지란의 책임을 물어 이순신은 옥에 갇힌 뒤 백의종군했고, 원균도 도원수 권율로부터 곤장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이순신은 원균이 자신과 함께 명장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꺼려했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선조는 이순신, 권율, 원균 3명을 모두 선무일등공신으로 봉하라는 명을 내린다.
◆왕건 vs 견훤
후삼국시대 약 50년간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룬 인물이 바로 왕건과 견훤이다. 왕건의 남진정책과 후백제 견훤의 북진정책이 첫 충돌한 곳은 나주 일대. 이후 해군력이 약했던 견훤은 909년 영암 덕진포 전투에서 참패한 뒤 쪽배를 타고 도망쳤다. 궁예가 물러난 뒤 우호적 관계로 바뀌었지만, 견훤이 신라를 공격했을 때 왕건이 구원군을 보내며 다시 적대적 관계로 돌변했다. 본격적인 대결은 925년 현재 구미 금오산성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였지만 이때는 승패를 결정짓지 못한다. 이후 화친과 적대를 거듭했고,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경애왕을 살해하자 왕건이 개입하며 공산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왕건은 기병 5천을 이끌고 직접 전투에 나섰지만 견훤에 밀려 쫓기게 됐고, 신숭겸이 옷을 바꿔입고 대신 죽음으로써 왕건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견훤은 909년 해전의 패배를 복수한 셈이다.
◆김옥균 vs 민영익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일에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가장 먼저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던 중도 개화파 민영익. 둘 다 조국 근대화를 다짐했던 개화파였지만 방법이 달랐다. 김옥균은 일본을, 민영익은 청나라를 조선을 막아줄 나라로 생각했다. 특히 김옥균이 청나라를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사대주의의 대상으로 본 데 반해 민영익은 청나라를 아직 믿을 수 있는 조선의 보호막으로 여겼다. 이런 시각 차이 때문에 김옥균은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을 일으켰고, 민영익을 제거 대상으로 삼게 됐다. 라이벌을 적으로 돌린 셈. 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김옥균은 청나라 이홍장을 찾아 상해로 갔다가 자객 홍종의 칼 아래 목숨을 잃는다. 김옥균이 살해되기 전 민영익은 암살 음모를 일본 영사관에 알렸지만 묵살당했다. 적으로 변해버린 라이벌들의 불행한 최후.
김수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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