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을 사이에 둔 이웃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서로에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인 때가 더 많았다. 워낙 오랜 옛날부터 역사적으로 얽히고설킨 탓이다. 현대에 들어선 스포츠에서 서로 우위를 확인하기 위한 자존심 싸움이 대단하다. 3월 막을 올리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아시아 예선에서 두 나라는 다시 한 번 숙명의 대결을 벌인다.
▶질긴 악연, 누가 풀까=한국이 축구만큼은 일본에게 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일본은 야구에서 한 수 아래라 여기는 한국에 지는 것이 쉽게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다. 공교롭게도 축구에서 일본이 치고 올라온 것과 반대로 야구는 한국이 일본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양상. 맞대결과 한국 선수들의 일본 프로무대 진출을 통해 양국 선수들은 서로 얼굴을 익혀왔다.
일본 대표팀에는 한국 선수들과 프로 무대에서 한솥밥을 먹는 이들도 여럿이다. 대표팀 출전을 고사한 이승엽이 뛰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하라 다츠노리 감독이 사령탑으로 차출됐고 이승엽과 절친한 사이인 아베 신노스케가 포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가 중심 타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호타준족의 아오키 노리치카, 후쿠치 가즈키는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임창용의 팀 동료다. 하지만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이상 서로 밟고 넘어야 할 적군일 뿐이다.
한국과의 대결에서 아픔을 간직한 선수들도 눈에 띄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일본이 자랑하는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 레드삭스)다. 이번에 한국전 선발 투수로 등판이 유력한 마쓰자카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이승엽에게 예선과 동메달 결정전에서 각각 홈런, 2타점 적시타를 두들겨 맞으며 고개를 숙인 적이 있다. 때문에 이승엽의 불참이 내심 반가울 법도 하다.
마쓰자카가 일본 마운드의 핵이라면 스즈키 이치로(시애틀 매리너스)는 타선의 기둥. 하지만 이치로 역시 한국전에서 쓰린 기억을 갖고 있다. 2006년 제1회 WBC 대회를 앞두고 '한국이 30년 동안 (일본에) 이길 생각을 못하게 해주겠다'고 장담했으나 자신은 배영수(삼성)가 던진 공에 엉덩이를 강타 당했고 일본은 한국에 두 차례나 패하며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강속구를 던지는 일본의 최고 마무리 투수 후지카와 규지(한신 타이거즈) 또한 마찬가지다. 후지카와는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준결승전에서 2대1로 앞선 7회말 한국에 동점을 내주며 일본의 기대를 저버렸고 금메달을 자신했던 일본은 결국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하게 됐다. 후지카와는 일본 언론을 통해 "한국 팀이 가장 상대하기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에 진 빚을 갚아주겠다고 선언한 한국 선수들도 있다. 일본전 선발 등판이 예상되는 김광현(SK)은 아오키 노리치카에게 설욕하겠다고 벼르는 중이다. 신인이던 2007년 스프링캠프 첫 실전 등판에서 3점 홈런을 맞았고 베이징올림픽 때는 적시타 한 개를 포함해 3안타를 내줬다. "내 볼을 정말 잘 때리는지 다시 한 번 붙고 싶다"는 것이 김광현의 출사표.
'발야구의 대명사' 이종욱(두산)은 10여년 전 마쓰자카에게 당한 기억을 잊지 않는다. 1998년 선린정보고 재학 시절 청소년 대표에 선발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나섰는데 당시 일본 대표였던 마쓰자카에게 삼진만 두 번 당했던 것. 이종욱은 "볼넷으로 걸어 나가기보다 안타를 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젊어진 한국, 패기로 승부='사무라이 재팬'을 기치로 내걸고 일찌감치 준비에 들어간 일본과 달리 한국은 악재의 연속이었다.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에게 지휘봉을 떠맡기다시피 하며 코칭스태프를 구성했지만 선수 차출이 또 문제였다. 투타의 기둥인 박찬호(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이승엽이 태극마크를 고사했고 '여권 분실로 인한 불참'이라는 석연치 않은 변명을 댄 김병현마저 낙마했다.
김 감독은 베테랑들이 대표팀을 이끌어주길 기대했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내야 수비의 핵인 박진만(삼성)의 어깨 상태가 좋지 못해 주전 유격수 자리를 맡기기 어려워진 점도 주름살을 늘게 했다. 결국 뜻하지 않게 대폭 '세대 교체'를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제 기대하는 것은 젊은 선수들의 활약. 2006년 대회 때 30대가 주축이었으나 이번 대표팀의 주력 선수들은 20대다.
패기로 무장했다지만 20대 선수들의 경험도 만만치 않다. 도하아시안게임의 실패를 거쳐 베이징올림픽에서 숱한 고비를 넘고 금메달을 목에 걸면서 쌓은 국제 경험은 소중한 재산이다. 단기전은 투수력이 관건인데 류현진(한화), 김광현은 갓 스물을 넘겼지만 국내에서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통할만한 기량을 갖췄고 배짱 역시 두둑하다.
특히 1982년생 동갑내기인 추신수(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이대호(롯데), 김태균(한화)이 포진할 것으로 보이는 중심 타선에 거는 기대가 크다. 셋 중 1회 대회 때 유일하게 출전한 김태균은 당시 이승엽에 가린 탓에 세 타석에만 들어서 안타 없이 볼넷 하나와 몸에 맞는 볼 하나만 기록했다. 하지만 모두 충분히 일(?)을 낼만한 저력을 갖고 있다.
험난한 마이너리그 생활을 청산하며 메이저리그로 도약한 추신수는 지난해 빠른 발과 중거리포로 맹위를 떨치며 클리블랜드의 중심 타자로 성장했다. 역대 홈런왕 계보에 이름을 올린 '친구이자 라이벌' 이대호와 김태균은 힘과 정교함을 겸비했다. 이대호는 베이징올림픽 일본전에서 동점 2점 홈런을 때려내며 이미 일본 투수들의 경계 대상 1호로 떠오른 상태다.
한국과 일본, 대만, 중국이 참가하는 아시아 예선은 일본 도쿄돔에서 모두 치러진다. 한국의 첫 경기는 3월6일 오후 6시30분 대만전. 한국과 일본이 각각 대만과 중국을 모두 이긴다고 가정할 때 양국은 지역 예선에서만 두 차례(7일 오후 7시, 9일 오후 6시30분) 경기를 갖는다. 1회 대회 4강 신화와 베이징올림픽 우승에 빛나는 한국 야구의 선전이 기대된다. 채정민기자 cwol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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