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살인범 강호순이 신문 지상에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많은 이들은 그에게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게 하라고 강변한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자신의 목숨도 내놓으라는 얘기다. 사형제의 존폐를 둘러싼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12년째 사형집행이 되지 않은 '실질적 사형제 폐지국'이지만, 사형제도는 여전히 상당수 대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사형수들의 대모' 조성애(78) 수녀에게도 요즘은 불편한 시기다. 최근 잇따른 흉악범들의 등장에 사형 집행을 재개해야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사형수들을 찾아다닌 지 벌써 만 20년. 그들의 사연을 풀어놓는 그녀의 눈시울은 인터뷰 내내 붉어졌다 맑아지길 거듭했다.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를 극도로 자제한다는 조 수녀를 18일 오전 서울 용산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만났다. "하도 인터뷰 요청이 많아 아예 수녀원 칠판에 '지방'(지방에 출장 가서 없다는 뜻. 휴대폰도 없다)이라고 써놨어요. 인터뷰를 안 하려니 요청이 더 많네요." 팔순을 바라보는 그녀는 여전히 소녀 같았다.
◆호적에서 두 번 파일 뻔했어요
-수도원에 들어갈 때 집안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원래 학창시절에는 사범학교를 다니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주 4·3사건 현장에서 참혹한 현장과 트럭에 죽은 사람들을 싣고 가는 광경을 보면서 희생과 봉사를 하는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간호학과를 나와 수녀원에 가겠다고 했더니 아버지가 호적에서 파버리겠다고 하셨어요. 수녀원 대신 평생 결혼하지 않고 자선 사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부산 감천의 영아원에 갔어요.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모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권유로 수녀의 길을 택했어요. 6·25 전쟁 때는 군대에 지원을 했다가 호적에서 파일 뻔했죠."
-재소자들과 사형수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뭔가요?
"할머니 수녀님들이 사형수 보호 운동을 하시는 걸 보며, 재소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나서면 잘 될 것 같다는 건방진 생각을 한 거죠. 그런데 수녀님들이 아직 젊어서 안 된다며 재소자 편지 상담부터 해보라고 하셨어요. 10년 동안 편지 상담을 하고 1988년에 본격적으로 교정활동 허락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재소자들을 교육시켜서 좋은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제가 많이 배웠어요."
-본인이 수녀라는 사실을 후회한 적은 없나요?
"후회는 아니었고 유혹은 있었죠. 30대 후반이었는데 아버지가 병세가 위독해 입원을 하셨어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수녀를 그만두고 가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엄청난 유혹이었죠. 아무리 성경을 읽고 또 읽어도 그 유혹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혼자 고민을 하다가 영적 지도 신부님을 만나서 한참을 울고 나니 유혹이 없어졌고 마음속 파도가 잔잔해졌어요. 그래서 누구든 고민이 많을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를 하라고 해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그런 상대가 없었던 거예요. 유영철도 '내가 어릴 때 누구에게라도 이 감정을 다 풀고 치유를 받았더라면…'하고 후회를 하더라고요."
◆마음의 문을 여는 비결은 인내
-처음 사형수를 만났을 때 기억이 나세요?
"마주 앉았는데 조금 무서웠어요. 한쪽 눈동자도 이상했고. 한참 가만히 앉아있다가 손을 딱 잡았어요. '너무 손이 곱다. 남자 손이 왜 이렇게 예쁘지?' 그러니까 조금 마음이 열려요. 묻는 말에 대답도 하고 부드러워졌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어린 시절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친척 집을 전전하는데 '야, ○○이 온다 문걸어 잠가라' 그 말이 귀에 꽂히더래요. 그러면서 남들 눈치보며 아무렇게나 살다가 애정행각을 벌이는 남녀를 보고 울컥해서 살인을 했다고 그래요."
-처음에 보면 서먹할 텐데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여세요?
"인내가 제일 중요해요. 종교는 제쳐두고 쓸데없는 얘기도 하고 유행가도 불러줘요. 인간적으로 먼저 사귀어야 돼요. 그러다 보면 '수녀님은 우리 누나처럼 생겼다'고 농을 걸어요. 그러면 '누나가 못 생겼나봐. 나 못 생겼는데' 이런 식으로 가요. 지존파 우두머리 김기환도 그런 식으로 접근을 했어요. 막 소리 지르고 안 한다고 화를 내는 김기환에게 '에이, 그러지마. 속은 안 그러면서 겉으로는 왜 그래. 그러지마 손해야' 그랬더니 차분해졌어요. 조금 사귀게 되면 제가 이겨요. '지금 사회에서는 유치원생까지도 지존파 김기환을 안다. 그 나쁜 것을 소문 냈으면 이제는 그들에게 좋은 걸 남겨야지' 했어요."
-1997년 12월 사형수의 집행 현장을 지켜보셨다고요?
"대구구치소 집행장이었어요. 12월 23일이었는데 광주, 대구, 대전, 서울 등 4군데서 집행을 했어요. 새벽 2시가 넘어 택시를 타고 대구까지 갔어요. 마지막 순간인데 사형수는 죽기 싫다거나 자기 사건을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러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어요. 소가 눈물을 흘리듯이 소리없이. 그래서 '죽기 싫어?' 물었더니 '아니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이런 후한 사랑을 교도소에 와서 받았습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보는 사람은 말문이 닫힙니다. '정말 미안하다. 지금까지 작은 것도 법을 어기지 말라고 했던 것이 죽을 때 잘 죽으라고 한 것밖에 안 되는구나.'"
◆평화를 얻으려면 용서하세요
-흉악범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으시죠?
"마음이 많이 아프죠. 이번 강호순 사건도 정말 눈물이 나고 피해자들이 너무 안 됐더라고요. 형제들 얘기 들어보면 막상 일을 저지를 때는 잡힐 생각을 안 한대요. 자기 잘못에 가책을 받지 않으니 반사회적인 성격이고 정신질환자예요. 하지만 그들에게도 살 기회를 줘야 해요. 치유를 믿어야 해요. 사람은 교육을 통해서 얼마든지 좋게 변할 수 있어요. 사형수들이 범죄 후 1년이 지나면 너무 예뻐져요. 눈동자나 근육이 달라져요. 참 명주실처럼 부드럽다 싶죠. 제가 가해자나 피해자 가족을 다 만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려면 서로 용서하는 수밖에 없어요. 피해자 가족들도 원한을 가진 분들도 있지만 몇몇 가족은 용서를 하고 나니 평화롭다고 하셔요."
-피해자 가족들은 대개 어떤 반응을 보이나요?
"예전에 수소문을 해서 피해자 가족을 만나러 갔는데 피해자 딸이 어머니와 통화를 하고는 문전박대를 해요. 고통스러운 마음을 나누기 위해 왔다고 해도 막 나가래요. 그래서 '이해한다' 그러고 밖에서 맴돌고 있으니까 피해자 아버지가 나오셔서 얘기를 했어요. 지금도 가끔 찾아가요."
-유영철과는 요즘도 편지 교환을 하시나요?
"지난해까지 편지를 하다가 요즘은 오지 않아요. 제게 화가 났나 봐요. 저는 유영철이 보낸 편지를 공개하면서 그도 이렇게 뉘우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는 생각이 다르더라고요.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냐'고 하는데 참 미안했어요. 그때부터 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믿을 수 없는 세상,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곡해를 하는 것 같아요."
◆사형제는 국가에 의한 살인
-사형제가 폐지돼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도 사형수들을 정말 사랑하셨어요. '죄는 밉지만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셨어요. 헌법은 인간은 존엄하고 그 가치를 천명해요. 그래서 흉악범들을 그 자리에서 해치지 않고 교정시설로 보내잖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이들이 선하게 된 후에 사형집행을 해버려요.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흉악범을 잡아넣은 국법이 다시 살인을 하는 거예요. 사형집행을 안 하면 흉악범죄가 일어난다는 의견은 사실이 아니에요. 사형제는 범죄 억제 효과가 없다는 게 밝혀졌잖아요.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가 138개국쯤 돼요. 실제로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 일본, 중국보다 사형제가 없는 프랑스나 영국의 흉악범죄율이 더 낮아요. 우리나라도 사형 집행을 안 한 지 12년째가 됐고 국제 앰네스티는 대한민국을 실질적 사형제도 폐지국가로 분류해요. 평생 감옥에서 자유를 제약받으며 뉘우치게 할 수도 있는데 죽이자는 것은 너무 잔인해요."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여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것도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제가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을 모두 만나지만 범죄 피해자는 숨어다니진 않아요. 그런데 가해자 가족은 2, 3대까지 숨어 살아요. 우는 것도 사치스러운 것 같아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해요. 아이들은 무슨 죄가 있어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빠 얘기를 들었을때 어떻겠어요? 다른 범죄가 생길지도 몰라요. 그건 복수나 보복에 지나지 않아요."
-좋지 못한 성장 환경이 흉악범을 만든다고 하셨는데요?
"어릴 때 교육이 너무나 중요해요. 어느 형제는 어머니가 시각장애인, 아버지는 청각장애인이었어요. 네살이 되자 어머니가 가출을 했어요. 큰형은 정신질환자였고, 아버지는 음독 자살을 했어요. 조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이 형제가 눈이 굉장히 나빠요. 수십번 취직을 해도 금방 쫓겨나고. 그래서 팔목을 몇 번이나 그었는데 다 살아났어요. 가는 곳마다 쫓겨나다 보니까 세상에 대한 홧김에 차를 몰고 질주를 했어요. 그게 1991년 여의도 광장 차량 질주범이에요. 사형 선고를 받고 열심히 살겠다고 그랬는데 1997년 겨울에 결국 집행을 당했어요. 그 형제가 쓴 자서전을 제가 소설가 공지영씨에게 건넸고, 공지영씨가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쓰는 데 참고했죠."
-수녀님께 주어진 시간이 3일뿐이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가끔 '내가 갑자기 죽으면 애들은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해요. 편지 오면 답장할 사람이 없잖아요. 죽었다고 그들에게 연락이라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죽기 전에 편지는 좀 써놔야겠다 싶어요. 나 죽으면 이 주소로 다 부치라고. 그래도 걸을 수만 있다면 사형수들에게 가야지요. 더 오래 살기보다는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한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사형제가 폐지돼서 그들의 생명만은 자연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소원이에요."
장성현기자 jacksoul@msnet.co.kr 사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 조성애는 누구?=1931년 서울 출생. 서울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입회했다. 명동 성모병원과 성 바오로 병원에서 간호사로 활동했고 인천 박문여고 교사로도 근무했다. 1977년 재소자들을 상대로 한 편지 상담을 시작했다. 10년간의 상담 끝에 1977년부터 교도소 사목으로 헌신해 왔다. 특히 1978년 사형수 14명과 자매결연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사형수와 가해자 가족, 피해자 가족을 돌보며 사형제 폐지운동에 앞장서 왔다. 조 수녀가 돌본 사형수 중 9명은 안구와 신장을 사회에 기증했고, 조 수녀는 가족이 인수하지 않은 사형수 시신 32구를 직접 거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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