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미영이 만난 사람] 서양화가 곽수영

파리에서 나는 자주 개인주의에 대해 생각했다. 혼자 카페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차를 마시는 일이 많아지면서였다. 추월이라도 당할까 파리 사람들은 재빠르게 걸어 다녔고, 살짝만 부딪쳐도 정색을 하며 사과했다. 그런가 하면 백화점의 계산대에선 비효율적일 정도로 줄을 서 기다려야 했다. 곳곳에 계산대를 두어 고객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라고 했다. 오전부터 사람들은 불편해 보일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주변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얘기를 나누었다.

퇴근 무렵에 전철을 타면 흔들리는 손잡이를 잡고 신문 속 크로스 워드를 진지하게 풀고 있는 많은 직장인을 항상 볼 수 있었다. 길에서는 바게트를 우적우적 씹으며 또는 담배를 피우면서 남녀 청년들이 지나갔다. 교통 신호를 제대로 지키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참으로 특이한 것은 그 느긋하고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마치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아무런 탈 없이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도심에서도 차 경적은 거의 울리지 않았고, 길에서 드잡이를 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보질 못했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개인의 책임성'이라는 것인가.

그때 곽수영(55)씨의 그림을 보았다. 온통 작업복과 모자에 물감을 묻힌 채 노동자처럼 작업을 하는 화가의 뒤로 우아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섬세한 선들이 소용돌이 같기도 하고 위쪽으로 타오르는 불꽃 같은 느낌을 주는 아니, 새집을 만드는 잔가지처럼 엮여 뭉쳐진 선들이랄까. 마치 불화(不和)하는 각각의 곡선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따뜻하고 자유롭게 서로를 보듬고 있는 듯했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림의 테마를 물었다.

"선(線)입니다. 여러 색으로 번복되어 칠해진 바탕에 뾰족한 연장으로 긁어낸 것이지요. 두꺼운 마티에르를 살을 긁어내거나 채찍질하듯 끊임없이 담금질하다 보면 어느 순간 반대급부처럼 부드럽고 평화로운 형태가 생깁니다. 아니 덩어리라고 할까요. 아기와 엄마의 고요한 행복 같은, 잔가지를 모아 만든 새의 둥지, 또는 포근한 실뭉치 같은 정적이 생깁니다. 기쁨의 자리지요. 하지만 간혹 어떤 예민한 이들은 무브먼트가 전혀 없는 이 그림들을 보고 살을 긁어내듯 그리면서 이런 평화와 환희를 원하느냐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하." 예민한 몇몇 사람들의 그 말은 바탕의 두꺼운 마티에르가 확인을 시켜주었다. 바탕에 대해서 물었다.

"준비된 유화물감이나 도자기의 유약 같은 것을 주로 사용합니다. 보통 열 번을 덧칠하는데 한 번씩 마를 때까지 2주일이 걸리지요. 그러면 20주가 되나. 그 후에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몇 주일쯤 또 소요되지요." 그가 처음 만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계속 작업을 하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마르는데 2주일이 소요되는 한 과정을 도중에 그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일이 철필로 정교한 선을 긋는 밀도 높은 작업이 신경을 해치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물감층들을 긁거나 파고들면서 혹은 벗겨내면서 선(線)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내게는 마치 수행(修行)하는 것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살을 긁어낸다는 제 작업으로 보는 사람들이 안식을 얻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했어요. 아이러니하지만 섬세함이 이루는 덩어리, 그 형태의 부드러움을 나타내기 위해선 철필로 긁는 강한 제스처가 필요해요. 평론가 프랑소와즈 모낭씨는 조각가 자코메티의 크로키와 같은 느낌을 지닌 그림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그때 속으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리 남쪽 알레지아에 있는 제 집이 바로 자코메티의 작업실 옆이거든요. 지금 대학생인 아들은 에꼴 드 자코메티(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했습니다. 자코메티의 조각들이 수행자(修行者)의 모습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곽수영씨는 대구 칠성동에서 태어나 사대부중고를 거쳐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어릴 적부터 렘브란트와 부셰를 좋아해 1984년 3년간의 직장생활(워너브라더스 만화영화사, TBC(동양방송) 컬러TV 미술부)을 접고 파리에 도착했을 때 루브르에 달려가 부셰부터 실컷 보았다고 했다. "올해로 파리에 온 지 25년이 되는군요. 요즘의 유학생들과는 달리 도착했을 당시엔 고학생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업을 했어요. 하지만 어렵고 힘들다는 느낌은 희박했어요. 내가 좀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거든요. 외부에서의 자극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파리행을 강행했던 터라 이곳에서의 모든 일들이 즐겁고 기쁜 일이었죠. 내 그림에서 평론가들은 본질적이고 우연한 감옥을 본다고 하더군요. 여행자의 시각으로 고립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없이 타자의 시선을 감지해 나가는 것, 본질적인 존재감이라고 할까요. 제 여정(旅程)의 연륜(年輪) 같은 것을 그들이 감지한 것 아닌가 생각해요."

그러면서 86세의 평론가 삐에르 데카르그 씨를 만난 이야기를 했다. "개인전 도록을 제작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소개를 거쳐 데카르그씨를 만났어요. 워낙 고령인 터라 그림들을 차에 싣고 그의 집으로 갔지요. 그런데 대뜸 제 그림을 루브르 아트페어에서 봤다는 겁니다. 아트 페어에 출품된 그 수많은 작품 속에서 말이죠."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의 그림은 스쳐만 지나가도 잔상이 오랫 동안 남는다. 마치 별빛을 볼 때의 느낌이랄까, 그는 그것을 지나간 것들에 대한 애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러한 소재를 찾기 위해 역이나 교회, 도심의 뒷골목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그것을 일종의 흔적 찾기로 그는 명명했는데 눈에 보이는 형태나 시간, 그리고 시적이고 종교적인 것들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는 재현해 내고 싶다고 했다.

"수세기 이전에 제작된 동판을 구하여 그것을 작업에 이용하기도 했어요. 예를 들면, 동판에 새겨져 200년이 지난 귀부인의 초상을 완전히 지우지 않고 원형의 한 부분에 모양이나 장식들을 새로이 첨삭하여 그때 인물의 자취를 되살려 내는 작업이었는데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또 다른 기억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판화를 할 때는 유화처럼, 유화작업을 할 때는 판화처럼 작업을 합니다. 한자나 알파벳을 결합시킨 작업을 한 적도 있어요." 보편적인 것에서 남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기억을 끄집어낸다는 말이다. 어떤 작업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다.

"2005년이던가. 프랑스 국립카드박물관에서 '서로 교차되는 초상화'란 주제의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인데요. 투명한 필름에 열댓명의 사진을 실루엣만 색연필로 그려서 겹쳐 놓아 선만 남게 한 작품이었죠. 비물질적인 몽환 상태에 놓인 익명성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 작품이 기억에 남는군요. 하지만 제 그림은 지금도 계속 바뀝니다. 언젠가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실험하겠지요."

판화작품의 두터운 터치에 대리석 가루를 사용하고, 몇몇 유화작품엔 도자기 유약으로 색을 표현한다고도 했다. 벽에 걸린 목탄가루를 이용한 작품을 보니 앞으로도 정진하는 선(禪) 수행자처럼 작품을 할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크게 웃었다. 지난해 가을, 서울 예술의 전당 세계 속의 한국미술전과 대구 아트 페어에 참여했다. 다시 파리에 가면 자코메티의 옆집, 8M 높이에 유리천장이 있어 비오는 날 풍경이 기가 막힌다는 그의 집을 꼭 구경하고 싶다고 나는 말했다.

시인·작가 콜로퀴엄 사무국장

◆곽수영

1954 대구출생

1980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1987 파리 소르본느 8대학 조형미술학 석사

▶ 개인전

2006 파리문화원 초대작가전 (파리, 프랑스)

2005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 / 세종갤러리 (포항)

2001 갤러리아트사이드 (서울)

2000 갤러리가나보브르그 (파리, 프랑스)

1999 퍼슨스디자인스쿨화랑 (파리, 프랑스)

1997 스페이스 언타이틀드 (뉴욕, 미국)

1994 에스파스 아르스날 (이시레물리노, 프랑스) 외 다수

▶ 단체전

2008 프리즈 드라 떼뜨 (로망, 프랑스) / 갤러리89 (파리, 프랑스) / 대구아트페어,맥향화랑, 대구 / 세계속의 한국미술 파리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2007 Triptique (앙제시립미술센타, 프랑스) / ACAF NY (뉴욕, 미국) / Art Fair 21 (쾰른, 독일) / Art Paris (그랑팔레, 파리, 프랑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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