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들의 한판 승부를 그린 영화 '적벽대전Ⅱ(감독 오우삼)'는 어마어마한 스케일 못지 않게 허풍과 의리를 강조하는 영화다. 원작 소설 '삼국지'가 유비, 관우, 장비 3형제의 '3류 건달식 의리와 사내다움'을 중심으로 한다면 오우삼의 '적벽대전Ⅱ'는 오나라 장수 주유(양조위)의 사내다움을 강조한다.
영화에서 주유는 그지없이 빛나고 상대인 조조는 한없이 초라하다. 우아하게 차 마시는 주유, 검술 솜씨 끝내주는 주유, 거문고 잘 뜯는 주유,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주유, 적에게까지 관대해 도량 넓은 주유, 착한데다 싸움도 잘하는 주유,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는 주유, 적을 마음대로 속일 줄 아는 주유…. 여기에 주유와 동맹을 맺은 유비의 장수 조자룡은 장대높이뛰기 세계 기록 보유자 이신바예바보다 장대높이뛰기를 더 잘한다. 조자룡이 긴 창을 땅에 박고 날아올라 적을 처치하는 모습은 스파이더맨을 초라하게 만든다.
영화는 주인공을 멋있게 꾸미기 위해 상대를 철저하게 야비한 악당으로 만든다. 조조는 어리석기 그지없어 부하를 함부로 죽이고, 여자에 눈이 멀어 공격 시기마저 놓친다. 조조 수하의 명장 하후 장군은 여자(주유의 아내인 소교)를 붙들고 인질극을 벌이다가 조자룡의 주먹 한방에 나가떨어지는 얼간이가 된다. 수십만 대군을 지휘하는 당대 최강 조조와 그의 장수를 여자를 붙들고 인질극이나 벌이는 잡범으로 만든 것은 해도 너무했다.
조조의 10만 대군을 섬멸한 후 주유가 조조를 놓아주면서 '왔던 곳으로 가시오. 이 전쟁에 승자는 없소'라고 멋있게 지껄이는 모습은 허풍을 쳐도 정도껏 치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적을 잡아놓고 놓아줄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사실 주유는 군사력이나 용병술, 어떤 면에서도 조조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영화 '적벽대전Ⅱ'에는 실체로서 사내는 없고 만화 주인공 같은 주유와 실체를 알 수 없는 의리가 있을 뿐이다.
사내다움이라면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 역시 사내다운 본드를 만들기 위해 허풍과 목숨 경시라는 양념을 듬뿍 발라놓았다.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는 적진에 비밀리에 침투하고도 상대가 '누구냐?'고 물으면 천연덕스럽게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지껄인다.
그런 장면은 철없는 관객에게는 영웅적 면모로 보일 수 있지만 그 내면에는 '적'을 '동급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깔봄이 숨겨져 있다. '동급'이 아닌 상대니 본드의 적수가 될 수 없고, '동급 인간'이 아니니 나와 같이 붉은 피를 흘리는 인간일 리도 없다. '007시리즈'에 죽음이 난무하지만 붉은 피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이 영화의 생명 경시를 잘 보여준다. 본드에게 적들의 목숨은 생명이 아니라 군홧발 아래 밟히는 자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자갈이 피를 흘릴까, 비명을 지를까…. 그래서 제임스 본드의 손에 죽는 적들의 죽음은 실체의 죽음으로 와 닿지 않는다.
당연한 결과로 제임스 본드는 상대를 살해하는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비행기에서 격투 끝에 적을 떨어뜨리며 본드는 '무임 승차하는 사람은 질색'이라고 이죽거린다. 마치 게으른 주부가 파리채를 휘두르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오우삼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영웅본색' 역시 사내다움, 의리를 주제로 하는 영화다. 암흑가에서 성장한 송자호(적룡)는 친구 소마(주윤발)와 형제처럼 지냈다. 두 사람은 암흑가 보스 아성(이자웅)의 범죄기록이 담긴 테이프를 미끼로 200만달러를 훔쳐낸다. 그들이 200만달러를 챙겨 달아나고 아성의 부하 조직원들은 부두까지 쫓아온다. 이때 자호의 동생이자 경찰인 자걸(장국영)이 부두에 나타나 갱들을 덮치려다 오히려 갱들에게 잡힌다. 돈을 갖고 홍콩을 떠나려던 자호와 소마의 계획에 차질이 발생한 것이다. 자호는 동생을 구하기 위해 부두에 남아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소마에게 돈을 건네며 먼저 떠나라고 말한다. 소마는 말한다.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먼저 가, 곧 따라갈게."
돈 가방을 든 소마는 보트를 타고 부두를 떠나고, 부두에서는 자호와 조직원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소마는 죽음의 땅에 두고 온 친구와 곧 도착할 화려한 삶 사이에서 갈등한다. 수중에는 200만달러가 있다. 보트를 타고 곧장 가면 행복한 미래가 펼쳐진다. 미인, 저택, 술, 쾌락이 넘치는 곳이다. 바다 저 앞쪽에는 화려한 삶을 은유하는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방금 떠나온 홍콩의 부두에는 총알이 빗발친다. 돌아가 봐야 개죽음뿐이다. 그럼에도 소마는 화려한 네온사인을 뒤로하고 뱃머리를 돌린다. 그것이 사나이의 의리이기 때문이다.
부두로 돌아온 소마는 한 손에 기관단총을, 한 손에 연발 권총을 들고 '두두두두' 적들을 죽인다. 갑작스러운 우군의 출현에 자호는 놀란다. 이윽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소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히죽 웃어 보인다. 그리고 신나게 적을 죽이던 소마는 결국 적탄을 맞고 쓰러진다.
미인도 술도 쾌락도, 어쩌면 목숨까지 돈이면 살 수 있는 시대, 자호와 소마는 의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의리 앞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사내들의 이야기는 로망을 갈구하는 뭇사내들의 눈시울을 적시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납득될까.
사내다움을 이야기하는 영화는 걸핏하면 폭력과 허풍, 의리를 동반한다. 허풍, 의리, 화려한 발 차기, 상대방 깔보기, 무지막지한 살인이 '사내다움의 키워드' 일 수는 없다. 인도 캘커타 빈민의 삶을 다룬 영화 '시티 오브 조이(City Of Joy·1992·감독 롤랑 조페)'는 고요하지만 얼마나 남자다운가.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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