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마지막 남는 것

외래진료를 보는 시간이다. "선생님, 큰일났어요. 기억이 자꾸 없어져요. 어제도 친구 집에서 꿔 준 돈을 받아 지갑에 넣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그 지갑을 그대로 친구 집에 두고 왔잖아요. 머리를 수술하면 기억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컴퓨터 차트에 혈압을 기록하며 불편한 점이 없느냐고 묻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수개월 전 파열된 뇌동맥류를 수술받은 환자다. 나이를 보니 68세로 기록되어 있다.

"할머니, 연세가 68세로 기록되어 있네요. 그러면 기억력도 차츰 없어질 나이신데 그 원인을 수술받은 것에 덮어씌우면 제가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 나이가 무엇이 늙었다고 그러세요. 우리 동네 80세 된 형님도 총기가 나보다 훨씬 또렷또렷한데. 하여튼 수술받고 나서 완전히 기억이 없어졌어요. 금방 듣고 나서도 조금 있으면 잊어버리고, 가스불도 켜놓고 외출하고… 불안해서 못살겠어요."

억울했다. 머리 수술만 받고나면 모든 것을 수술 탓으로 돌린다. 감기가 걸려 머리가 아파도,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떨어져도, 시력이나 청력이 떨어져도 모두가 머리 수술 때문이라고 단정한다.

"할머니, 제 친구 부인은 가스불을 켜놓고 다른 친구 딸 결혼식에 갔다가 아파트에 불을 낸 경우도 있습니다. 그 친구 부인은 60살도 안 되었고 뇌수술도 받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는 70세 근처가 되어 그런 증상이 생겼으니 양호한 편입니다." 기억에 약간 도움이 되는 약을 처방했다.

기억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다. 단기기억은 측두엽의 해마(海馬)가 주요 역할을 하고 장기기억은 대뇌의 연합영역(association area· 聯合領域)이 주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정보는 해마나 연합영역에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 검색 기관이 작동해서 사용한다. 할머니같이 금방 한 일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해마의 기능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 입 주위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떠오르지 않는 것은 검색기능이 저하되어 그러하다.

나이가 들면 눈도 어두워지고, 청력도 떨어지며, 기억력도 감퇴한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기억해서 마음에 두는 일도 적게 하라는 자연의 섭리인 듯하다. 아무리 기억력이 사라짐을 서러워한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하나 잊어가다가 마지막에는 깨끗한 백지 상태로 떠나는 것이 우리들 삶이 아닌가? 그래서 '마지막 떠나는 날 남는 것은 살아생전 남에게 준 것뿐이다'라고 누가 그렇게 처절하게 말하지 않았던가?

임만빈 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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