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에 갔다 어느 선생님 얘기를 듣고 웃은 적이 있다. 한 아이의 학업적인 뒷바라지를 잘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전제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첫째는 할아버지의 경제력, 둘째 아버지의 한없는 이해, 셋째 동생의 물심양면 희생이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날 저녁 퇴근해 들어가니, 올해 초교에 입학하는 막내 녀석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반색을 하며 이야기했다. "엄마! 오늘 정말 좋은 일이 있어. 지금부터 보여줄게. 놀라지 마. 잠깐만 눈 감고 기다려 줄래?" 무슨 대견한 일을 한 듯한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서는 한참을 있다 나오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엇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다가와 코앞에 대주면서 눈을 뜨라고 했다. 무슨 놀라운 것인가 싶어 눈을 떠보니 연말 정산을 하느라 이런저런 교육비 지급 영수증을 요청해놓고는 서둘러 서류들을 내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미술 교육비 지출내역서였다.
왜 이걸 건네줄까 싶어 이리저리 살피니 아이가 "어디에다 전시해 놓을까"라면서 정말 행복해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너무 진지하고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영문을 몰랐지만 차마 왜 그러냐고 묻지 못했다. 그러더니 아이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꼭 짚어주는 곳이 있었다. '대상'이었다.
순간, 내 뒷머리가 무엇에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그랬다. 아이의 이름을 적는 난에 씌어진 '대상'이 아직 어린 막내에게는 금상, 은상, 동상 할 때의 그 상의 종류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학원에서 미술작품 상을 탈 거라는 연락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날이었으니 오죽했으랴. 자기도 드디어 해냈다는 성취감이 얼굴 가득했다. 아이의 행복한 환상을 깰 수 없어서 그냥 "축하, 축하한다"며 한참을 안아주었다.
그날, 막내 아이가 잠든 후에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형들의 상장을 자기들 방안에 그대로 붙여두고 막내에게 동기 부여라도 되라고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형들 칭찬을 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은연중에 어린 것에게 스트레스였을 수도 있었겠다 싶었다. 그날로 벽을 깨끗이 정리하고 기록을 모두 파일 속에 넣어 보관하기로 했다.
마음껏 집에서 뒹굴며 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형들의 시험이나 공부 스케줄 때문에 자동차를 타고 멀리 가서 함께 기다리기도 하고 때로는 새벽에 잠이 덜 깬 채로 자동차에 올라 잠을 자면서 전국을 유람(?)해야 했던 막내였다. 그런 막내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늘 뒷전으로 밀리기도 하여 마음에 어쩌면 상처로 남았겠다 싶었다. 막내가 만든 달력에 적힌 올해의 소원은 딱지, 기차, 강아지다. 그래서 평소에 온종일 앉아서 봐도 아쉬워하던 수성구의 고모역으로 "기차 보러 갈까"라고 했더니 보상이라도 받은 듯이 반색을 하며 "아이, 너무 좋아"라고 했다.
기차를 타고 목적지에 내리고 나서도 그 기차가 다시 출발할 때까지 플랫폼에 멈춰 서서 출발하는 기차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를 원하면 형들은 바쁜데 시간만 죽이고 있다고 투덜대곤 했었다.
나름대로 하고 싶은 것을 참고 조정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막내 아이에게 더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대상 아동이니 말이다.
정명희(민족사관고 1학년 송민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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