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진보당 사건 조봉암

1959년 2월 27일 진보당 사건으로 구속된 조봉암에게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했다. 1956년에 창당한 진보당이 간첩과 접선하며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이유였다.

1958년 1월 조봉암을 비롯한 당 간부 전원을 검거하고 2월에 정당 등록을 취소한 지 1년만에 형이 확정됐고 그해 7월31일 집행됐다. 1심에서 징역 5년이 선고되자 반공청년들이 담당 판사를 용공으로 몰아붙여 피신하는 사건까지 발생했고, 2심에서 결국 사형이 선고돼 대법원으로 이어졌다. 간첩 혐의라기보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리란 우려 때문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1956년 5월에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216만여표를 얻어 500만표로 당선된 이승만에게 위협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의 표 중에 대구경북이 50만표, 부산경남이 50만표를 차지했으니 오늘날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하고 ML당을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에 입각한 항일운동을 하다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했다. 해방 후 공산당을 탈당해 중도노선을 선택,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 부의장까지 지냈으나 1952년 2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이승만과 갈라섰다.

김재경 사회1부 차장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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