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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백두를 가다] 안동의 진산 '학가산'

▲ 사진은 학가산의 광흥사. 광흥사는 한때 경북 북부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 사진은 학가산의 광흥사. 광흥사는 한때 경북 북부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안동의 진산 학가산은 검무산이라는 새고을 천년의 길을 열었다. 그럼에도 학가산은 또 다른 '보물'을 안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임노직 수석연구원은 "옛날 학가산의 진수를 안 선현(先賢)들은 학가산 곳곳을 다니며 시와 유산기(기행문)를 읊었고, 오늘은 봉화·안동 땅의 청량산과 함께 산수문학의 보고로 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작은 산세에도 불구하고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워 영남의 거령(巨靈), 가장 영적인 산"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학가산은 조선 중기까지 사찰과 암자가 30여개 있었고,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학가산의 남쪽 자락인 풍산 땅에 사찰과 암자가 200여개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학가산의 불교 문화가 얼마나 컸는지는 서후면 자품리에 있는 광흥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광흥사는 조선 왕실에서 세 번이나 원당(나라가 공인한 사찰)으로 지정받았고, 1827년에 법전, 원당, 요사, 문루, 종각 등 470여칸이 일시에 화재로 소실됐다고 하니 그 규모를 실감케 한다.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등은 시로써 학가산의 산수를 읊었고, 퇴계의 문인인 송암 권호문은 학가산을 너무나 사랑해 수십편의 시와 함께 지금의 학가산 봉우리와 전망대의 이름을 명명하기도 했다. 영남의 각종 문집 등에 학가산을 소재로 한 시가 5천여편, 유산기(기행문)도 30편을 넘어 학가산은 새 도청 소재지와 문학이라는 보물을 동시에 품고 있는 것이다. 이종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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