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추위가 한풀 꺾였다지만 아직 밤바람이 차디찬 2월 하순. 어디선가 들려오는 관악기 소리에 방향을 가늠한 뒤 대구시 수성구 중동 신천동로변 한 건물의 좁은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섰다. 오후 7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분주히 발길을 옮길 시간이지만 교실 한칸보다 비좁은 지하실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 앉았다. 다양한 관악기가 저마다 소리를 한껏 높인 탓에 가히 소음에 가까운 상황이다 보니 귀에 입을 바짝 대고 고함을 질러야 들릴 정도다. 순수 아마추어 관악기 동호인 모임인 '한울림 관악합주단'의 소중한 연습실이다. 오는 5월 정기 연주회 준비에 여념이 없는 그곳을 찾았다.
그칠 줄 모르던 소음이 갑작스레 멎었다.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어앉은 40여명의 연주자들 앞에서 가만히 연습을 지켜보던 지휘자가 벌떡 일어서 지휘봉을 세워 들었기 때문.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됐다. 저마다 목청을 돋우던 악기들은 출발선에 얌전히, 하지만 언제든 뛰쳐나갈 태세로 광기를 번뜩인 채 잔뜩 웅크리고 있다. 첫 곡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1975년 영화 '배리 린든'(Barry Lyndon)에 삽입된 헨델의 사라방드. 아카데미 4개 부문 수상작인 '배리 린든'은 18세기 아일랜드 청년 배리 린든이 유럽으로 건너와 우여곡절 끝에 귀족과 결혼하지만 결국 몰락하는 과정을 그렸다. 연주가 시작되는 그 순간, 열린 지하실 문 밖에서 흘러들던 주변의 자동차 소음과 사이렌 소리마저 웅장한 선율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플루트와 클라리넷의 호소력 짙은 소리에 이어 트럼펫과 트롬본의 강렬함이 뒤따르고, 색소폰과 호른은 흠 잡을 데 없이 빈틈을 메워 버렸다.
두번째 연습곡은 영화 '늑대와 춤을'의 주제곡. 한두차례 실수가 이어지자 지휘자 이동인씨는 차분한 미소 속에 강한 메시지를 담아 이렇게 조언했다. "남의 것을 듣지 않으면 절대 자기 소리를 낼 수 없습니다." 음량이 작을 수밖에 없는 클라리넷의 멜로디를 살려달라는 당부의 말. 행여 연주자들이 주눅 들세라 지휘자는 "클라리넷 소리가 안 들리면 사이비예요"라며 농을 건넸고, 이내 긴장을 푼 연주자들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다. 지휘자의 손놀림에 따라 마치 춤을 추듯 선율이 흘러나왔고, 잠시 눈을 감은 채 귀를 맡긴 기자는 테네시의 푸른 평원 위에서 늑대와 쫓고 쫓으며 한바탕 춤추듯 뛰어다니는 존 던비(케빈 코스트너)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세번째 연습곡은 '아리랑'. 먼저 고백하자면 '저런 쉬운 곡도 따로 연습하나?'라고 기자는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그 생각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느리지만 힘이 넘치는 아리랑 음률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지휘자는 이내 안색을 바꾸고 연주를 중단시켰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아리랑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너무 신나게 부르고 힘이 넘칩니다. 하지만 아리랑은 그런 곡이 아닙니다. '빼앗긴 것'을 들려주는 곡이며, 모든 것을 빼앗긴 뒤 이제는 다 체념한 듯 허탈한 마음을 담은 곡입니다." 이씨는 한동안 말을 이어갔다. 정신대 할머니 이야기였다. 꽃다운 나이에 정신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겪은 뒤 버림받았고, 가까스로 고향에 찾아왔지만 반겨주는 이 없어서 결국 집창촌으로 들어간 어느 정신대 할머니. 이제는 나이가 들어 집창촌 앞 평상 위에 쭈그리고 앉은 채 하염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부르는 그 아리랑. 결코 격정적이지도 목 놓아 울지도 않는 그 아리랑을 지휘자는 원했다. 그리고 다시 연주가 시작됐다. 아리랑이었지만 아리랑이 아니었다. 평상 위에 앉아 그 한 많은 세월을 떠나보낸 할머니의 아리랑이었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연습은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연주자들은 저마다 부족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서로 격려했다. 지휘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순수 아마추어들이지만 합주 실력은 상당한 수준입니다. 10명 정도는 전문 연주자가 내는 소리에 가깝습니다. 물론 초보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화 내지 않습니다.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제가 잘하게 만들어주면 되는 겁니다." 다시 연습이 시작됐다. 소음은 음악으로 변했고, 비록 연습이지만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드라마가 아닌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었다. 연습실 뒤쪽 칠판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영원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위하여'. 바로 한울림이 나아가는 지향점이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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