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일본 도쿄(東京) 근교의 시립병원 응급센터. 의사 마스오카 쓰요시(쓰마부키 사토시)는 고열로 입원한 환자를 단순 감기로 진단한다. 그러나 다음날 환자가 사망한다. 첫 번째 사망자 발생 9일 만에 비슷한 증세로 850여명이 사망하고, 2주 뒤 일본 전역이 감염된다. 이에 세계보건기구(WHO) 메디컬 담당자인 고바야시 에이코(단 레이)가 시립병원으로 파견되고, 그녀와 마스오카는 전염병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두 사람은 의과대학 시절 학생과 조교로 은근히 좋아했던 사이다.
조사 결과 감염 원인은 공기를 통해 번지는 바이러스 '블레임'이었다. '블레임'은 거침없이 질주한다. 사망자가 90만명을 넘어서자 도시에는 더 이상 매장할 장소를 찾기도 힘들었다. 정부는 정확한 사망자 수를 파악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상사태가 선포됐고 감염 우려자는 외출이 금지됐다. 이동이 금지됐고 물과 생필품은 배급되기 시작했다.
거리는 폐허로 변했고 약탈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300만명을 넘어서고 군인들이 투입돼 감염자를 색출, 격리했다. 진료 중이던 의사와 간호사도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도쿄 인구에 맞먹는 1천만명이 감염됐다. 사회 각 분야는 통제력을 잃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스오카와 니시 교수는 '블레임' 바이러스가 동남 아시아의 외딴 섬 미나스의 동굴 박쥐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혀낸다. 감염 원인을 알아냈지만 백신 개발에 실패하고 첫 사망자 발생 6개월 후 바이러스는 전 세계로 번져나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한다.
26일 개봉한 영화 '블레임'은 알맹이 없는 수다쟁이 같다. 바이러스의 확산과 이를 막으려는 의료진의 고군분투, 자신이 죽어가면서도 환자를 걱정하는 의사, 어린 딸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집에 가는 대신 환자를 돌보다가 감염돼 쓰러지는 간호사, 연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땅'(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으로 돌아오는 남자, 바이러스 확산이 자기 잘못인 줄 알고 죄의식에 자살하는 양계장 주인…. 영화에는 수고와 희생, 아기와 모성애, 사랑과 약속, 목숨을 건 책임, 간절한 기도와 눈물, 위로와 박수가 난무하지만 정작 관객에게 감흥은 전달되지 않는다.
엉성한 짜임새 탓에 영화 속 배우들만 스스로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박수칠 뿐이다. 시청자는 하나도 우습지 않은데 TV 오락프로 출연자들끼리 박장대소하는 모양 같다. 게다가 바이러스 재앙이라는 자칫 단순해질 수 있는 플롯을 보완하기 위해 삽입한 마스오카와 에이코의 신뢰와 사랑 이야기는 겉돈다. 각색의 물감을 쓰기는 했지만 이 색깔, 저 색깔, 여기저기 막 찍어대는 통에 그림이 아니라 '호작질'을 해놓은 듯하다. 영화 '블레임'과 지구와 혜성의 충돌을 그린 '딥 임팩트'(감독 미미 레더, 1998년 개봉)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블레임'은 흔히 할리우드 영화가 드러내는 '미국식 애국주의'와 닮은 구석이 있다. 영화 속 일본 의사들은 인류애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다. 블레임 바이러스를 일본에 옮긴 의사 타치바나 슈지는 동남아의 작은 섬 '아본'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사람이다. '아본'은 오지 중의 오지로 국가의 경계도 모호하고,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곳이다. WHO조차 외면한 이곳을 일본인 의사가 지키는 것이다. 영화는 타치바나 슈지가 '아본' 섬 근처 '미나스' 섬에서 이상증세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하다가 감염됐고 딸을 만나기 위해 잠시 일본에 귀국한 사이 전염병을 옮긴 것으로 설정돼 있다. 다시 미나스 섬으로 돌아온 슈지는 죽는 순간까지 그 섬의 환자들을 돌본다.
나중에 바이러스의 원인 규명을 위해 이 섬을 찾은 마스오카와 니시 교수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댔던 원주민 어린이는 '이들은 그 의사(타치바나 슈지)와 같은 말(일본어)을 쓰는 사람들이야. 좋은 사람들이야'라는 말을 듣고 금방 '어깨동무'를 허락할 만큼 신뢰를 표시한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임을 자처한다면 일본은 인류의 주치의임을 은근히 자랑하는 것이다. (하긴 일본이 전 세계 오지에서 펼치는 의료봉사 활동은 눈길을 끌 만하다.)
영화를 보면서 에이즈와 사스, 에볼라, 이 영화에 등장하는 '블레임' 바이러스 중 어느 것이 가장 무서울까 생각했다. 답은 에이즈일 것이다. 모든 바이러스는 숙주가 살아있는 동안만 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숙주를 가장 오래 살려두는 에이즈는 가장 진보한 바이러스다. 숙주가 오래 사는 만큼 바이러스의 생명도 길고, 전염 범위를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블레임' 바이러스는 감염 3, 4일 안에 사람을 죽이고, 에볼라와 사스 역시 수일 혹은 수주 안에 사람을 죽게 한다. 그러나 에이즈는 적게 잡아도 수년, 길게는 십년 넘게 숙주를 살려둔다는 점에서 훨씬 집요하고 지능적이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사람을 가축처럼 사육한다는 기분 나쁜 느낌마저 든다.
사람(사람 유전자)은 어떤가? 사람은 '사람의 숙주'인 지구를 얼마나 오래 살려둘 작정일까? '숙주'인 지구를 빠르게 파괴하는 만큼 인류의 생명도 빠르게 파괴될 것은 분명하다. 숙주에 얹혀 살 수밖에 없는 한 숙주를 오래 살리는 게 최선이다.
영화 '블레임'은 일본 감독 제제 다카히사가 연출했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국내에도 알려진 쓰마부키 사토시와 이케와키 지즈루, 단 레이 등이 출연했다. 원제는'감염열도(感染列島)'. 국내 개봉 제목이기도 한 신종 바이러스 '블레임'은 '신이 내린 고통, 혹은 신의 징벌'을 의미한다. 폐허가 된 잿빛도시 풍경은 이 영화가 보여준 최고의 선물이다. 12세 관람가.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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