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모아와 파키스탄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해오던 정용식(44), 정은영(44) 부부는 미국 위스콘신주의 시골 마을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달 정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도착한 미국 시카고는 영하 10℃를 넘기고 있었다. 미국에 오기 전 체감 온도가 영하 40도라는 메일을 받고 내심 긴장을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시카고에 도착해 위스콘신으로 가는 길은 온통 눈이었다. 제설 차량을 따라 겨우 도착한 위스콘신의 케노샤. 살고 있는 아파트는 난방도 하지 않아 냉기가 체온을 빼앗으려고 했다.
좁은 아파트에 낡은 가구와 오래된 전자 제품들이 눈에 띄었다. 모두 벼룩시장에서 1, 2달러에 구입한, 남이 쓰던 물건들이다. 이들은 의사 부부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가난한 의사 부부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은 파키스탄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다가 1년간 안식년을 보내기 위해 미국의 시골 마을로 왔다. 그들이 의료 봉사 활동을 하던 파키스탄은 세계 최악의 치안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국인들에 대한 테러도 자주 일어나고 있고, 심지어 외국인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총탄이 날아들 정도였다. 그곳에서 이들은 4년 넘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펼쳤다. 왜 이들은 이 힘든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둘은 계명대 의과대학 의예과를 졸업하고 1991년 결혼했다. 남편은 36개월간의 공중보건의를 거쳐 1993년 동산의료원 인턴, 1998년 전문의 과정을 마쳤고, 아내도 포항 선린병원에서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병원도 개업했고, 아내는 소아과 과장으로 근무했다. 의사 부부라면 한국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애초부터 돈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했다. IMF 사태가 닥친 1998년 이들은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꿈꾸었다. 당시 외국의 어려운 나라를 도와주기 위해 정부가 설립한 한국국제협력단을 찾았다. 의사들은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고, 그나마 IMF 사태로 지원금도 끊긴 상태. "돈 얼마 못 받아도 좋으니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싶다고 지원했죠. 그런데 정부 지원금은 없다. 알아서 가라고 했습니다."
서사모아 정부에 지원을 했다. 한국인 의사가 오겠다니 흔쾌히 받아주었다. 1999년 일본을 거쳐 3일 만에 서사모아에 도착했다. "완전히 스팀 사우나였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죠." 그래도 며칠 지나니 견딜 만했다. 그러나 8세이던 아들이 알레르기가 너무 심해 결국 서사모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본업을 제쳐놓고 봉사에만 매달렸다. 2004년 2월 파키스탄을 찾았다. "처음에는 10일 예정이었죠." 그러나 신석기 시대처럼 살고 있는 그들을 보고는 도의적으로 버릴 수가 없었다. "시골에는 주사 한 대 맞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썩어가는 다리에 수천 마리의 파리떼가 꼬인 모습은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사막을 헤매면서 환자를 돌보던 그는 "차라리 여기에 정착해 살면서 도와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을 모두 데리고 파키스탄으로 들어갔다.
10여명이 근무하고 있는 카라치시의 한국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상황은 열악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정전이 되는 바람에 수술이 중단되기 일쑤였다. 장비나 도구가 형편없어 성병과 에이즈, 간염 등 전염병에 노출됐고, 폭탄 테러의 위험도 따랐다.
2005년 10월 인도와 파키스탄 북부에 대규모 지진이 일어나 8만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들은 당시 동산의료원에서 파견된 의료진들과 함께 현장에 뛰어들었다. 캐슈미르 산악 지역에는 온통 길이 끊기고, 학교와 병원이 무너져 수천명이 깔려 죽었다. 산사태로 오지에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장비를 등짐지고 산을 넘나들면서 진료를 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한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건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3, 4개월을 그렇게 진료했고, 파키스탄 사람들의 호응도 좋았다. 스리랑카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도 의료 봉사를 했다.
그들이 살던 파키스탄북부는 영하 14도의 기온에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나무를 때서 난방하고 밥을 하는 형편이었다.
처음 도착해서는 가족들이 이질에 걸려 40도의 고열에 한 달씩 설사를 하기도 했다. 아내 정씨는 "처음에는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반대도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은 견딜 만하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우리가 어려울 때 누군가 도와줄 분이 있지 않을까요."
그들은 "힘들었지만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힘든 이를 도와주는 일을 천직처럼 여기고 있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이기에 더더구나 고마운 일이다. 안식년을 마치면 파키스탄으로 돌아갈 예정이다.
둘의 재산은 거의 없다. 한국에서 번 돈도 다 썼다. 지금은 선후배 의사들의 후원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물 한 모금도 소중한 오지의 경험이 이들의 영혼을 부자로 만든 것이다. 죽음을 무릅쓴 봉사활동임에도 그들은 베푸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더 필요한 사람에게 지식과 기술,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고속도로 통행료 1.5달러를 아끼기 위해 시골길을 70년대 중고차로 달려 시카고로 기자를 태워주면서 그는 "머리가 새하얗게 될 때까지 의료 봉사를 계속하겠다"고 했다. 목도리 하나 없이 허술한 옷에 살을 에는 강풍을 맞으며 손을 내미는 그를 보며 기자는 눈물을 쏟을 뻔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다. 그것은 그에게서 전염된 휴머니즘이었다.
위스콘신에서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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