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억'이야말로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생명과 정체성을 인증해 줄 단 하나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 사상'이라는 것은 평범하고 우둔한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죽은 뒤에 내가 다시 다른 축생으로 태어난다 한들, 지금 삶의 기억을 가지지 못한다면 '지금의 나'는 결국 영원히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또한 나에게 전생이 있었다 한들, 지금의 내가 그 전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그것은 어차피 나에게는 '무(無)'와 다름없지 않을까.
움베르트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바로 이러한 '기억'과 '존재'의 사이에 놓인 상관관계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가진 소설 속의 주인공은 어느 날 깨어나 보니 자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나폴레옹이 5월 5일 세인트헬레나에서 숨졌다는 등의 역사적 사실이나, '모비딕'의 첫 문장이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라'인 것과 같은 문학적 지식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과 아내의 얼굴 등 자신의 신변에 관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것의 좋은 점은 사랑했다는 사실을 추억하는 데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단 하나의 추억만으로도 살아간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만 할 뿐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 상황은 그보다 더욱 고약하다. 어쩌면 사랑을 했을지도 모르는데, 기억이 나지 않다 보니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움베르트 에코 지음/이세욱 옮김/열린책들/전 2권
에코가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로 삶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져주고 있다면, 추리소설로 일가를 이룬 작가 윌리엄 아이리시는 같은 소재로 짜릿한 서스펜스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 '본 3부작'이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메멘토' 등은 20세기 초에 아이리시가 시도한 '기억상실증' 모험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탕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치콕의 '이창'과 최근의 영화 '디스터비아'의 원안을 제공했던 서스펜스의 명인 아이리시, 그의 걸작 소설 '환상의 여인', '공포의 검은 커튼' 등은 에코의 작품처럼 해박하고 현학적이지는 않지만, 딱 그만큼의 스릴과 재미로 책 두께를 메워낸다.
그의 표정은 주위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큰 소리로 미쳐 날뛸 것 같은 그의 얼굴은 연인들로 가득한 5월의 달콤한 밤 풍경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표정이었다. (사형집행 150일전 오후 6시) 『환상의 여인』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이승원 옮김/창/9천원
박지형(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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