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3월이다. 꽃봉오리 벙그는 소리처럼 여기저기서 요란스레 전해주던 봄소식도 예년 같지 않다. 이리저리 어려운 탓 일게다. 그래서 마음도 몸도 추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이럴 때면 따뜻했던 추억이라도 불러들일 필요가 있다. 뜬금없이 성냥팔이 소녀처럼 성냥불이라도 켜서 멋진 환상을 보는 마음으로 말이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따뜻하고 봄이라고 하기에는 추웠던 딱 이맘때쯤의 일이다. 낮이 되면 집안보다는 햇살이 잘 드는 바깥이 오히려 따뜻했던 기억 속에서, 나와 친구들은 약속을 하지 않고도 속속 마을 어귀에 있는 담벼락으로 모여들곤 했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도 그 담벼락은 참 따뜻했고 흐르는 누런 콧물을 연신 들이키며 친구들과 재미난 얘기를 했었다. 해바라기처럼 그리 도란도란 거렸던 거다. 그때의 나는 충청도의 아주 작은 면에서 살았는데 신작로에 먼지 날리며 기세등등하게 다니던 버스를 타보는 것이 우리들의 작은 소망이었던 시절이다. 주전부리가 흔치 않던 때라 들이나 산에서 나는 찔레꽃 줄기니 산딸기니 하는 것들을 따서 먹곤 했는데 그중 우리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이 껌처럼 씹어 먹을 수 있는 '삐비'라는 풀이었다. ('띠'라고 하는데 햇볕이 잘 드는 강가나 산기슭, 들판, 풀밭 등에 무리지어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한번은 해바라기를 하며 도란거리다가 갑자기 한 친구가 삐비가 먹고 싶다고 했다. 아직 삐비가 나오기에는 이른 철이지만 우리들의 입안에서는 벌써부터 그 맛이 맴맴 돌고 있었다. 이윽고 한 친구가 삐비가 뭐가 맛있냐며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러자 곧이어 다른 친구도 맞장구 쳤고, 결국 처음 삐비 이야기를 꺼냈던 친구마저 "그래 맛없지 잉"하며 슬쩍 삐비 맛을 탓했다. 그리곤 우리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쪼그려 앉아 땅그림을 그리거나 발로 흙을 매만지거나 멍하니 앞만 바라보거나 했다. 분명 속으로는 삐비 맛에 대한 그리움으로 침이 넘어가는데도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미소 한가득 물려질 추억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니 '신포도 기제'(Sour Grape Mechanism)가 생각난다. 포도를 먹고 싶었지만 손이 닿지 않아 딸 수 없자 '분명 신포도'일 거라며 치부해버리는 여우의 자기 합리화. 계절이든 삶에서든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지금, 추억 속에서 찾아낸 신 포도 기제가 부정성이 아닌 "잘 될거야"라는 긍정성을 가진 교훈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권미강(구미시청 홍보담당관실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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