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전파를 탔던 드라마 '호텔리어'. 배용준, 김승우, 송윤아, 송혜교가 출연했던 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은 화려한 호텔의 이면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처음 접하게 됐다. 이후 '호텔리어'는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직종 중 하나로 떠오르기도 했다. 지난 2월 영진전문대학 국제관광계열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서상길(65) 교수는 우리나라 호텔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 가까이 호텔 실무를 맡으며 1970년대 문을 연 서울 신라호텔과 롯데호텔의 개업 멤버로 활약했고,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데 일조했다. 평생을 호텔리어로 살아온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일본에서 처음 배운 호텔 업무
-처음 호텔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원래 서울 홍릉에 있던 키스트(KIST), 그러니까 한국과학기술연구소에서 근무했습니다. 석박사 학위가 없었기 때문에 지원업무를 맡았는데 평생 직업으로 삼기는 마땅치 않았죠. 1970년대 초반, 일본과 합작으로 서울 도큐호텔을 설립하려던 때였습니다. 마침 채용 소식을 듣고 지원했는데 4명을 뽑는 자리에 2천여명이 몰렸습니다. 경쟁률이 600대 1 정도였죠. 며칠 걸려서 면접이 끝나도 연락이 없어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몇달 뒤에 합격 통보가 왔습니다. 1970년 11월에 면접을 봤는데, 일본 연수는 이듬해 3월이 돼서 갔어요."
-호텔 업무를 하게 된 것도 색다른 인연인 것 같은데?
"참 이상하죠. 일본에서 태어나서 해방 때 대구로 왔습니다. 여기서 고교까지 마치고 건국대 축산가공과에 입학했습니다. 기독교 학교인 계성고를 나온 덕에 미국인 선교단체에서 장학금도 받았고, 대학 가서도 연세대 인근 선교사 집에서 기숙하며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2학년 마치고 제대하니까 선교사분이 임기를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가셨더군요. 이후 가정 형편도 어려워서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키스트에 들어갔고, 호텔 일을 시작한 계기가 된 거죠."
-일본에서 처음 호텔 업무를 배울 때도 쉽진 않았을 텐데?
"아카사카 도큐호텔에서 연수를 했는데, 영어로 물어도 일본어로만 답을 하는 겁니다. 책을 갖고 배우는 것은 한계가 있다 보니 쉬는 날에 빵 몇 개, 우유 하나 사서 전철을 탔습니다. 역마다 한자로 표기가 돼 있고, 그 아래 영어로 읽는 법이 적혀 있는데 그걸 보고 배웠죠. 표 한장 끊어서 한바퀴 돌면 서너시간 걸립니다. 돈도 아끼고 일본어도 배웠죠. 5, 6개월을 하고 나니 대충 귀가 열리더군요. 아울러 영어나 일본어로 매주 3일 정도 일기를 쓰고 나면 부총지배인에게 검사를 받았습니다. 차 한잔 마시면서 일기를 검사하는데, 표현 하나하나 일일이 수정해 주면서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작문력이 놀랄 만큼 늘었죠. 그때 배운 일본어가 평생 이어졌습니다."
-전혀 생소한 분야였는데, 적성과는 맞았습니까?
"며칠 지나지 않아 부총지배인이 부르더군요. 쫓겨나나 싶어서 잔뜩 겁을 냈는데, '당신은 접객 쪽과는 맞지 않는 것 같다. 연회 예약 쪽을 해봐라'고 하더군요. 이튿날부터 다른 유니폼을 입고, 열쇠관리, 전등 켜는 스위치, 이면지 사용, 문서 송달 등을 배웠습니다. 연회가 잡히면 정원 관리부터 식당에 음식 주문, 현관 벨보이에게 VIP 고객 응대까지 일일이 통보해줍니다. 몇달 지나니까 간단한 예약은 혼자서 받도록 하더군요. 담당자가 '당신은 역시 접객보다는 영업운영 쪽이 맞는 것 같다'고 격려해 주더군요."
-다른 쪽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
"지금 와서도 후회스러운 일 중 하나가 팔길이나 상체 길이 등 신체조건을 봤을 때 요리사를 했으면 성공했을 거라는 겁니다. 영어를 조금 공부했기 때문에, '요리사를 하면 어떻겠느냐? 프랑스에서 4년 정규 학위과정을 마친 뒤 실무를 익히면 호텔이 10년 내에 인도네시아에 진출할 예정인데 책임자로 보내주겠다. 일본인을 보내면 인도네시아에서 거부감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가면 적합하겠다'는 제안을 받았어요. 그런데 칼 잡고 불 앞에서 일하는 게 겁나더군요. 선임자 권유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해 손해를 봤죠."
◆아시안게임, 올림픽 그리고 중국·일본 호텔 총지배인
-당시 호텔 업무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안 좋았죠. 나쁘다기보다는 잘 몰랐으니까. 처음 호텔에 투신한 뒤 몇 해 지나서 1978년 서울 신라호텔이 문을 열 때만 해도 확 달라졌습니다. 선호직업 10위 안에 들기도 했죠. 신라호텔 면접을 보는데 고(故) 이병철 회장이 직접 면접장에 나왔습니다. 이 회장님이 제게 꽃에 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그 꽃은 마르기 무섭게 살짝만 건드려도 꽃잎이 바스러집니다'라고 답했더니 '어! 안다'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입사한 뒤 바로 일본 오쿠라호텔로 일년간 연수를 갔습니다. 주차장, 정원 관리부터 풀장수질 관리, 식당 및 연회장 집기 관리까지 배웠습니다. 심지어 보일러 청소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나중에 관리자가 됐을 때 모르면 시키지 못하니까요."
-이후 여러 차례 호텔을 옮기셨는데 몸값도 꽤 올랐겠네요?
"처음 도큐호텔에서 신라호텔로, 그리고 롯데호텔로 옮기면서 연봉 협상은 한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금전적으로) 여유 있거나 당당한 인물은 못 되더라도 비굴하게 굽신거리지는 말라고 가르치셨죠. 그런 영향 때문인지 호텔에 근무하면서 팁을 받는 부서에는 한번도 가지 않았습니다. VIP 고객들이 선물을 전하는 경우는 가끔 있었습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은 소중한 경험이었을 텐데?
"특히 아시안게임이 기억에 남습니다. 급식사업단 부총지배인이 됐습니다. 1984년 중반부터 준비작업을 시작했죠. 당시 잠실에는 모래와 자갈뿐이었습니다. 물도 없어서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다 썼죠. 허허벌판에 가건물 지어놓고 선수촌 아파트를 지으면서, 어떻게 서빙하고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를 계획했습니다. 당시 수입 제한도 많았는데 일일이 공무원들과 접촉을 해서 해결해야 했죠. 특히 식재료 구입이 어려웠는데, 종전에 취급해보지 않던 품목을 수입하는 데 공무원 거부감도 컸습니다. 식재료 품목만 3천500개가 넘더군요. 심지어 꿀을 수입하는데도 '이걸 핑계로 밀수하는 것 아니냐?'는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한번 식사를 하면 50~120종류 음식을 준비합니다."
-호텔 운영을 책임지면서 각종 집기도 구입하셨겠군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 나루미, 영국 웨지우드, 독일 바우셔, 스위스 랑겐탈 등 그릇 제조회사는 다 견학을 했습니다. 거기서 수집한 샘플만 5t 트럭으로 4, 5대 분량이었습니다. 중요한 샘플은 당시 그룹 회장님께 직접 보여드립니다. 장갑을 끼고 직접 깨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포크와 나이프는 금 도금이 돼 있는데 고가 제품은 이 자국이 생기는지 일일이 깨물어 보셨죠."
-중국과 일본 호텔에서 총지배인까지 했는데?
"지금과는 화폐가치가 많이 다르겠지만 당시 연봉은 7천만~8천만원 정도였습니다. 중국에 갔더니 단독주택과 조선족 기사가 딸린 승용차를 주더군요. 통역 겸 비서로 일본에서 6년간 공부한 중국인이 있었고요. 톈진온천호텔에는 약 2년 정도 있으면서 개업만 도와주고 왔습니다. 일본 나고야 렉월드호텔은 객실은 180여개에 불과했지만 헬스센터, 사우나 등이 유명한 여가용 호텔이었습니다. 당시 그 호텔로 갈 때도 재미난 인터뷰를 했습니다. 호텔 사장이 70대 노인이었는데 직접 한국으로 찾아왔더군요. 바로 다음 비행기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김포공항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처음 일본에서 어렵게 배운 말이 인터뷰 때 큰 도움이 됐죠."
◆30년간의 호텔리어와 10년간의 교수
-30년 가까이 호텔에 몸담다가 학교로 오게 된 계기는?
"학부를 못 마치고 호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경희호텔학교가 생기면서 그곳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후 방송통신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고, 석사는 경기대에서 호텔매니지먼트 과정을 했는데 당시 석사과정 지도교수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영진전문대학에서 교수를 채용하니 가보라는 겁니다. 면접을 보러왔는데, 20명이 넘는 거예요. 당시 일본 렉월드호텔에 있을 때니까 '오후 비행기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 면접 보게 해주든지, 아니면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했죠. 한달쯤 뒤에 교수 채용 연락이 왔습니다."
-호텔리어로 근무할 때와 대학 교수로 있을 때, 차이가 많죠?
"좀 더 일찍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죠. 요즘 밤 11시가 넘으면 유학 간 제자들과 문자대화를 나눕니다. 미시시피, 라스베이거스에 취직한 제자들이 국제전화를 걸어오기도 합니다. 또 호주에 유학갔던 제자가 돌아와서 서울 한 유명 호텔에 취직했는데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올랐다며 전화를 걸어올 때면 무척 기분이 좋습니다."
-가장 인상 깊은 사람이나 사건을 꼽으라면?
"1976~1978년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청와대가 아닌 지방에 나갈 때면 숙식을 책임지는 자리였습니다. 지근거리에서 자주 뵙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30대 중반 시절이었는데, (박 대통령이) 창가에 혼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기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한 번은 충청도 어딘가를 갔는데, 추운 겨울이었어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신문을 보며(당시 지프가 신문을 가져다 주더군요)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는 보초 서는 사람들 춥다고 내복과 양말을 치수대로 사오라고 하더군요. 그러더니 보초 책임자를 불러서 '몇 명이냐? 키가 어떻게 되냐? 대중소를 샀으니 가져가서 입어라'고 일일이 신경을 써주던 기억도 납니다."
-호텔리어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고객의 입장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빨리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에 맞는 서비스를 성심성의껏 제공하려는 마음가짐과 행동이 바로 호텔리어가 갖춰야 할 덕목이죠. 이론과 학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병원, 은행 심지어 건설업도 모두 서비스업입니다. 다만 호텔은 원하는 서비스 수준이 훨씬 높죠. 그에 맞추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 서상길은?=1944년 일본에서 태어난 뒤 해방과 함께 대구로 왔다. 1971년 일본 도큐호텔에서 입문과정을 마친 뒤 일본에서 호텔리어 초급간부 및 중급간부 과정을 이수했다. 1977년 신라호텔을 거쳐 1981년 롯데호텔에 입사했고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당시 급식사업운영단 부총지배인,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유럽기자단 투숙 및 급식담당을 했다. 이후 중국 톈진온천호텔과 일본 나고야 렉월드호텔 총지배인을 거친 뒤 1998년부터 영진전문대학 국제관광계열 교수를 역임했다. 현업을 떠나는 국내 제2세대 호텔리어 중 마지막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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