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과할 수 없는 대통령, 닉슨의 변명…영화 '프로스트 vs 닉슨'

'진실은 있다 대결은 시작됐다!'

5일 개봉한 영화 '프로스트 VS 닉슨'의 홍보 문구다. '뷰티풀 마인드'(2001) '다빈치 코드'(2006) '파 앤드 어웨이'(1992)의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로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편집상 등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 1977년에 있었던 '워터게이트 관련 TV 인터뷰'를 소재로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TV 인터뷰'를 답습한 수준의 얘기가 아니다.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M. 닉슨은 미국 역사상 임기 중 사임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진실을 밝히지 않았고, 사과나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후임인 포드 대통령은 닉슨이 임기중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면했다. 영화는 그것에 대한 항의로 시작한다.

한물간 영국의 연예 MC 데이빗 프로스트(마이클 쉰)는 닉슨과 인터뷰를 추진한다. 프로스트는 엄청난 시청률이 보장된 인터뷰를 통해 화려한 재기를 꿈꾼다. 마찬가지로 닉슨(프랭크 란젤라) 역시 정치 인터뷰에는 초보인 프로스트와의 토론을 통해 정치적 명예 회복과 정계 복귀를 꾀한다.

인터뷰는 모두 4번. 3번째 인터뷰까지 프로스트는 고전을 넘어 속수무책으로 닉슨에게 당한다. 승리는 닉슨에게 돌아가는 듯했다. 마지막 인터뷰를 앞두고 늦은 밤 닉슨은 프로스트가 묵고 있는 호텔방으로 전화를 건다. 그리고 비참하게 패하지 않기 위해, 승리를 위해 죽도록 달려야 했던 자신의 고독한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자신의 적인 프로스트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3번이나 인터뷰를 했지만 나는 자네를 알 수가 없어. 언론에 난 걸 보니까 자네는 어울려서 파티하기를 좋아한다고 하더군. 승리해야 하네. 그래야 그 망할 자식들의 콧대를 꺾을 수 있지. 이긴 자에게는 태양이 비치지만 진 자는 시궁창에 쓰러질 뿐이야. 우리 둘 중 한 사람만 승리해. 그러니 우리는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하네. 술 한잔 했네. 하지만 쉽게 생각하지 말게. 나는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테니까."

인터뷰 기간에도 영화 시사회에 참가하고 데이트하고, 여유를 부리는 프로스트에게 경고를 던진 것이다. 이 살벌한 경고를 듣고 프로스트는 태도를 바꿔 치열하게 준비하고 연구한다. 그리고 끝내 4번째 인터뷰에서 닉슨을 무너뜨린다.(실제로 닉슨이 그렇게 경고했을 리 없고, 프로스트가 닉슨의 경고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을 리도 없다.)

바로 이 지점이 이 영화의 지향점이다. 그러니까 영화는 '워터게이트'의 진실을 밝히고, 닉슨의 사죄를 끌어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 영화는 외형상 닉슨을 비판하고, 닉슨의 패배를 선언하지만 실제로는 닉슨이 마주서야 했던 고독한 삶과 그가 내린 판단에 대해 이해를 구하고 있다. 그러니 닉슨이 술 기운에 프로스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감독이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인 셈이다.

4번째 인터뷰에서 닉슨은 얼마든지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가 감상적으로 흐르자 보좌관이 인터뷰를 중단하고 '위험'을 경고한다. 닉슨 자신도 위험을 알지만 중단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백한다.

"임기 중 나는 실수가 아니라, 잘못을, 범죄를 저질렀다. 나는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었다. 대통령 권한을 남용했고, 국민에게 고통을 주었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과할 수는 없다. 내 잘못은 머리가 아닌 마음의 잘못이었다. 나는 신념에 차 있었다."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닉슨의 이 고백을 이끌어냄으로써 프로스트는 완전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앞선 3번의 인터뷰는 잊혀졌고, 4번째 인터뷰만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았다. 텔레비전은 편집을 통해 닉슨을 완전한 패자로 만들었다. 그의 쓰라린 표정을 클로즈업해 강한 인상을 주었다. 프로스트는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인터뷰를 마쳤고, MC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는 늘 파티를 열며 살았고, 그의 파티는 사교계의 중요한 행사가 됐다. 이에 반해 닉슨은 외롭게 살았으며, 죽을 때까지 거의 세상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론 하워드 감독이 '프로스트의 승리'를 축하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까? 아닐 것이다. 프로스트와 그의 지지자들이 승리에 취해 축하파티를 열 때, 하워드는 닉슨을 향해 이해와 용서의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영화는 파당적인 국회, 적대적인 언론, 특위, 정적들,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전쟁 속에서 닉슨이 힘겨운 전투를 치렀음을 상기시켜준다.

'워터 게이트'로 닉슨은 이미 정치적으로 사망했다. 그러니 4번째 인터뷰에서 '워터 게이트'로 닉슨이 무너진다는 설정은 처음부터 이 영화가 파놓은 함정일 뿐이다. 그러니까 관객들은 영화를 통해 '닉슨을 위한 변명'을 듣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쁠 것은 없다. 1977년 TV 인터뷰가 닉슨을 부관참시했다면, 이 영화는 그의 무덤에 국화를 바친 것이니까.

닉슨 역을 맡은 프랭크 란젤라의 연기는 압권이다. 그는 닉슨의 외로움, 신념, 자기 분노, 패배자의 나약한 모습을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걸음걸이와 말투, 손짓을 넘어 영혼까지 닉슨을 재현하는 듯하다. 드라마/미국/122분/5일 개봉/감독 론 하워드/12세 관람가.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워터게이트 사건은?=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의 측근이 닉슨의 재선을 위한 공작으로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당사에 침입해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체포된 사건. 이 사건으로 닉슨은 임기 중에 사임한 유일한 대통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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