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희망을 나눕시다] "귀향 10년…'꿈 농사' 지어요"

상주 '신의터 농원' 조용학·김갑남 부부

▲ 황토집 안방 벽난로 옆에서 손수 만든 발효음료를 나누고 있는 조씨 부부.
▲ 황토집 안방 벽난로 옆에서 손수 만든 발효음료를 나누고 있는 조씨 부부.

젊은 시절 배운 중장비(포클레인) 일을 천직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 수원에서 조그마한 건설회사에 취업했고, 당시 유행했던 중동(사우디아라비아) 근로자로도 2년간 다녀왔다. 살림이 조금 나아졌고, 무언가 내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비큐 집. 2년도 안 돼 거덜이 났다. 늦둥이가 태어나면서 포클레인 1대를 구입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일거리가 많아 형편이 좀 피는가 싶었다. 그러나 곧 불어닥친 IMF 한파. 상상도 못할 만큼 혹독했다.

"일년 내내 추석과 설 명절 딱 두번만 일부 수금이 되었습니다. 일을 해주고 대금을 못 받으니 더 이상 버텨나갈 여력이 없었지요." 마음이 여려서 수금 독촉도 하지 못했다. 결국 사업을 중단했다. 1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실직…, 아내가 나섰다. 젖먹이 아들을 남겨두고 친척 언니와 서울 역삼동을 오가며 야식집을 시작했다. 오후 5시에 재료를 마련, 오전 5시에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스트레스와 피로만 누적될 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결국 6개월 만에 중단했다.

다시 시작해야 했다. 중고 포클레인을 구입했다. 그런데 속았다. 불량품에다 단종된 기계여서 폐기처분했다. 엎친 데 덮친 격. 곤궁한 삶이 거듭되면서 아내가 극심한 가슴병을 앓았다. "자살충동이 일어났어요. 그땐 정말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도시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했다. 돌아갈 곳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전셋집을 처분하고 자잘한 빚을 갚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 2천만원. 1999년 2월 25일. 그날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눈물을 머금고 낙향하던 그날을…!

조용학(51)·김갑남(50)씨 부부. 그들은 그렇게 고향인 상주 화동면 선교리 신의터 재를 넘어왔다. 솔밭단지 문중산 빈터에 우선 100㎡(30평)가량의 2층 황토집을 지었다. 남들은 하기 좋은 말로 "농사나 짓지" 하지만, 처음에는 정말 막막했다. 그 일대가 유명한 팔음산 포도 생산지여서 밭 2천480㎡(750평)를 빌려 포도농사도 시작했다.

초보 농사꾼이라 하는 일마다 힘들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래도 당초 맘먹은 대로 철저한 친환경 농사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서툰 솜씨였지만 우렁이 농법 등을 시도하며 각지에서 열리는 농사 강의에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점차 농촌생활이 익숙해졌다. 통째로 씹어먹는 무농약 포도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도시민들의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안주인 김갑남씨는 솜씨가 좋다. 평소 해보고 싶었던 발효음식에 유난히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들 부부 삶의 목표는 누구나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를 만드는 것. 마당에 있는 200여개의 단지에는 오늘도 된장·간장이 익어 가고 있다.

100% 우리 콩에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간장·된장·고추장 등 건강기능식품들을 도시인들과 직거래한다. "도시에 살면서도 늘 고향이 그리웠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귀향한 지 11년째. 중학교 2학년생인 막내 아들 현준이와 함께 살고 있는 희망의 보금자리 '신의터농원'. 이들 부부는 이제 자연을 사랑하는 자연인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농촌의 전원생활만을 꿈꾸면서 무턱대고 귀향을 한다면 적응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귀띔도 잊지 않는다. 그만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의터 농원'의 문은 오늘도 활짝 열려 있다. 새로운 희망을 나누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기 위해서다.

상주·이홍섭기자 hsl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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