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수암칼럼] 당신들은 총통이 아닙니다

會期 끝나면 민생 외면해도 되나. 외유 취소하고 임시국회 열어야

2차 세계대전 최대의 전투였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이 패배했던 원인의 하나는 어이없지만 '히틀러의 단잠'이었다.

연합군 함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으로 까맣게 몰려올 때 독일 해안초소는 재빠르게 기습 침공을 알아내고 서부전선사령부에 긴급 전신을 보냈다. 그러나 가장 가깝게 주둔하고 있었던 독일군이 자랑하는 최강 정예부대인 기계화사단은 출동을 하지 않았다. 막강한 화력과 기동력을 갖춘 기계화사단의 출동은 히틀러의 명령이 있어야만 허가됐고, 해안 초소들의 긴급 전신이 빗발칠 시간에 히틀러는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부전선사령관은 히틀러의 부관에게 총통의 잠을 깨워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총통의 잠을 깨울 수 없다.' 총통이 잠에서 깰 때까지 기계화부대는 발이 묶였고 해안 방어는 전략적인 때를 놓치면서 결정적인 패전으로 이어졌다.

세상일엔 절박하고 가장 우선해야 할 결정이나 조치가 돼먹지도 않은 가치 때문에 뒤로 밀려나 때를 놓치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있다. 히틀러의 잠은 깨울 수 없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관행적 권위와 돼먹잖은 카리스마가 우리 국회에서도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다. 속칭 민생 법안, 경제회생 법안은 온갖 핑계와 몽니 부리기로 팽개쳐 던져두고 會期(회기)가 끝났다며 줄줄이 해외로 나들이 나가는 행태가 그렇다. 마치 히틀러의 잠처럼 '국회의원의 외유는 미룰 수 없고' '국회의 회기는 바꿀 수 없다'는 식이다.

지금 민생과 경제 대책보다 더 절실하고 긴급하며 미룰 수 없는 국민적 우선 과제는 그 무엇도 없다. 국회를 해산해 버리는 것이 민생과 경제의 유일한 해법이 된다면 그까짓 국회쯤 당장 없애버려도 될 만큼 급박한 나라 형편이다. 본회의에 상정까지 해놓고도 싸움박질, 무단결석으로 정족수조차 못 채워 미뤄둔 민생 법안만 16가지나 된다. 30대 국책 프로젝트나 광역권 사업은 예산까지 책정된 상태에서 올 스톱돼 있다. 서민 집 문제에 도움 줄 '반값 아파트' 관련법, 청년 해외취업지원에 도움될 '청년 실업 해소 특별법', 영세기업 근로자 부담을 덜어 줄 '보험료 징수 통합법' 등은 상정조차 않았다. 그러고도 회기 끝났으니 해외여행 다녀올 동안 서민, 청년 실업자, 영세 근로자 너희들은 계속 고픈 배 쥐고 가슴속이 새카맣게 탈 때까지 소주나 마시고 있으라는 식이다.

신고 재산이 평균 수억 원대가 넘고 자식들 중엔 청년 실업자도 없고 넓은 아파트를 몇 채씩 가진 자들이 수두룩한 집단이니 실감 안 나는 반값 아파트법, 청년 실업법 따위보다는 봄바람 타고 해외 나가는 게 더 절실하고 급할지 모른다. 더구나 그 와중에 민생 법안은 의사진행 방해까지 하며 미루고 팽개친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의장 징계안은 전원 똘똘 뭉쳐 잽싸게 내놓았다. 미뤄지는 법안을 빨리 심의하라고 직권상정한 사람을 징계하자는 '긴박하지도 절실하지도 않은' 짓거리는 재빠르게 해치운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노무현 정권 때 편파방송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방송사의 사장을 지낸 덕에 민주당 비례대표 자리 얻어 국회의원 배지를 단 모 의원은 한나라당 대표가 출마하려는 지역에 '한판 붙기를 청합니다'고 나섰다. 이 위난 속에 멀쩡한 배지 떼 던지고 또 선거판에 나가 배지 바꿔 다는 닭싸움이나 하겠다는 얘기다. 맞장 좋아하는 좌파운동권 특유의 철학 빈곤을 본다. 이런 사람들 눈에 지금 이 나라의 절실하고 급박하며 가장 우선해야 할 결정과 조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민생을 못 보니 會期, 외유, 국회의장 징계가 더 절실하고 긴박한 과제로 보이게 되고 히틀러의 잠처럼 국회의원 회기와 외유는 미룰 수 없다는 오만스런 태도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오래전 다이제스트 잡지에서 봤던 '그는 왜 국회의원들을 쏘았는가?'란 글 제목과 함께 한 청년이 방청석 위에서 국회의원석을 향해 기관단총을 갈기던 삽화가 떠오르는 요즘의 국회 모습이다. 그들이 나치시대의 총통이 아니라면 3월 민생국회를 열고 외유는 즉각 취소하는 게 옳다.

金 廷 吉(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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