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두고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운 것이요,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사내는 높고 계집은 낮은 것이다. 어찌 늙은 할미가 안방으로부터 튀어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을 것인가? 신라는 여자를 잡아 일으켜 임금 자리에 앉게 하였다. 참말 어지러운 세상에나 있을 일이었으니 나라가 망하지 아니한 게 다행이었다.' 신라의 영민한 군주 중 한 사람이었던 선덕여왕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는 비단 김부식만의 특별한 시각이 아니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세상 일반이 여성을 그렇게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탓에 동양과 서양, 긍정과 부정, 선과 악, 미와 추를 막론하고 역사에 기술된 모든 이야기는 남자의 시각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유럽 문화의 뿌리인 헬레니즘 문화와 기독교, 아시아의 정서적 토대를 마련한 유교 등 거의 모든 사상은 여자들에게 억압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역사에는 스스로 일어선 여성, 잘난 여성이 드물다. 세상의 절반은 여자이고, 역사의 절반 역시 여자인데 기록된 여성의 숫자는 무척 적고, 평가 역시 형편없다.
이 책은 보존된 기록을 근거로 하되 남성 위주의 고정 관념을 걷어내고 여성을 바라본다. 이를테면 창녀 혹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여자들을 남자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다시 보는 것이다. 책은 다섯 개 장으로 구성돼 있다.
'뿌리칠 수 없는 유혹-팜므파탈'에서는 중국사의 팜므파탈들, 즉 상(商)나라의 마지막 임금 주의 총애를 받으며 죄인을 태워 죽인 달기, 주나라를 결정적으로 기울게 한 포사,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전한시대의 왕소군, 삼국시대의 초선, 당나라의 양귀비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 창녀로 폄훼된 비잔틴제국의 황녀 테오도라,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과 영국 국왕 에드워드 8세의 연인이었던 심프슨 부인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남성의 변함 없는 사랑을 받았다. 전쟁과 갖가지 비난 여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사랑받았던 것은 오직 미모와 잠자리의 성적 능력 덕분은 아닐 것이다. 어떤 남자도 잠자리에서의 성적 능력과 미모만으로 여성을 오랜 기간 변함 없이 사랑할 수는 없다. 그녀들은 흔히 '창녀' 혹은 기껏해야 '미모'로 폄훼되기 일쑤지만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칼과 거울의 마력-아마존'에서는 남자를 뛰어넘는 지성과 육체적 능력으로 나라를 위험에서 구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칼을 든 전사 브리타니아의 부디카, 인도 잔시의 라니, 그리스도의 여전사인 마틸다, 혁명의 순교자 샤를로트 코르테,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그들이다.
'어머니의 이름으로-어머니'에서는 아들을 낳아 훌륭하게 키우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 시대에, 후계자를 키우고 스스로 천하를 제패한 여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이 장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어머니'를 상징하는 따뜻함에서 벗어나 비정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정복자를 소유했던 마케도니아의 올림피아스를 비롯해 한나라의 여태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 청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서태후 등이 그들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니-혁명가'의 주인공은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조르즈 상드, 루살로메, 이사도라 던컨이다. 당시의 고정 관념을 뒤흔들며 격동의 시대를 개척한 그녀들의 삶은 현대 여성과 비교해도 다를 바 없다.
마지막 장 '불멸의 구원자-지도자'에서는 나라를 이끌어간 여성 지도자들을 만난다. 튜더 가의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 로마노프가의 세 명의 여황제, 아르헨티나의 구원자 에바 페론이 그들이다. 민중들의 사랑을 받았든, 민중들로부터 외면 받았든 그들이 이룬 업적은 자기 조국의 미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지은이는 이 책을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쓰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어떤 입장을 떠나 역사의 기록자 입장에서 냉정하게 썼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덕여왕이나 진성여왕에 대해서는 쓸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빈약해 이른바 '픽션'을 가미하지 않고는 한두 페이지 이상 쓸 내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빈약한 자료를 바탕으로 기록하는 것은 무책임하며, 자칫 지은이 자신의 '편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608쪽/2만1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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