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채우고 나와도 허청대는 게 월급쟁이다. 보따리를 싸는 순간 이제는 세상 뒷전이구나 하는 상실감부터 밀려든다고 한다. 그만두면 만세 부르며 놀 것 같았어도 막상 닥치면 너나없이 무너진다는 거다. 어딘가 나가지 않으면 인생이 끝인 듯한 초조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만 뜨면 나서던 출퇴근의 관성은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하물며 하루아침에 잘린 처지는 오죽하겠는가. 평생 구축한 생의 질서가 뒤집히고 존재가치가 부정당한 분원은 감당하기 어려울 게다. 간 쓸개 빼놓고 버틴 고용살이가 아니었겠나. 그 비통과 울화는 하루에도 몇 번씩 미치게 만들 것이다. 그가 식솔 딸린 40대 혹은 50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벌이가 끊긴 가장 앞에 남은 세월은 잔인한 것이다.
실직의 눈물은 본인만이 통절한 것이다. 남은 모른다. 안다 해도 그 절절함에 이를 수 없다. 모든 상처가 그러하듯 당한 자만이 겪어내는 통증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실직자 90% 이상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10명 중 2명은 가족한테도 실직 사실을 숨기고 있다. 저 혼자 힘들어하는 실직자가 많다는 얘기다. 남몰래 삭이는 저들의 적막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실직의 내상인 우울증이 급증하는 현실이 우울하다. 세상 관심을 끊고 자신을 폐쇄해 버리는 증세가 번지는 것은 위험천만한 징후다. 사방에 깔린 지뢰밭에 둘러싸여 아슬아슬하게 굴러가는 불안한 사회다. 중국 정부가 최근 자살이 늘자 경제성장률보다 사회 불안의 불길에 더 신경 쓰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다. 미국 대공황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실업은 인간 정신의 적'이라 규정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실직이 가져오는 인간 정신의 공황을 다른 어떤 폐해보다 두려워한 것이다.
실직에 대한 제일 큰 위로는 두말할 것 없이 일자리다. 하지만 있는 일자리마저 줄초상이 나는 상황이다. 보통 성장률이 1% 올라가면 일자리가 10만 개 생겨난다. 그 반대로 1% 떨어지면 10만 개가 날아가는 것이다. 정부는 당초 올해 3% 성장을 예측했다가 얼마 전 마이너스 2%로 확 낮췄다. IMF는 마이너스 4%까지 내려 잡았다. 그보다 심한 비관적 전망도 있다. 도대체 몇 십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는 건가. 공식 실업자 수를 최대 120만 명까지 보는 암울한 예측도 있고, 취업 준비생'그냥 노는 사람'아르바이트까지 따져 '사실상 백수 400만 시대'를 말하기도 한다. 저들의 가족까지 고려하면 대구 인구 몇 배가 실업의 그늘에 잠겨 있는 것이다.
정부가 일자리 나누기를 다그치지만 공공기관'지자체'기업 할 것 없이 아랫돌 빼 윗돌 괴기 식이다. 청년층 인턴 같은 일회성이나 생색내기 모양의 고통분담은 저들이 받은 충격과는 딴 얘기다. 129센터 같은 구직 창구를 열었다 해서 정부가 제 역할을 다한다고 할 수 없다. 실직의 아픔이 기댈 '마음나누기센터' 같은 세심한 배려가 절실한 때다. 풀죽은 저들을 위무하는 정부의 따스한 숨결이 필요한 것이다. 국가의 존재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데 나라에 애정이 생길 리 없다.
지자체도 일자리 예산이 전부가 아니다. 내 이웃 내 집안 변고라는 심정으로 실직의 정서에 다가가야 한다. 아이디어야 짜내면 왜 없겠는가. 대구 남구청이 연례 축제를 취소했다는데, 매년 벌이던 행사라도 초상 난 옆에서 잔치판 벌이는 것 같은 정신없는 짓은 말아야 한다. 향토 기업이나 대학들도 관심을 가질 일이다. 지역에 기대어 재미보는 소주 회사라면 지금 같은 때에 실직의 상심을 달래려는 어떤 시도쯤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토종은행이라고 내세워 한 해 2천억 원 이상을 벌어들이는 장사를 하면서 고객이자 지역민인 저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평소에 이런저런 걸로 지역사회에 내놓는다고 할지 모르나 그건 그거다.
서울대 울산대가 실직자들에게 강의실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을 헤아리는 깊은 속이 가상하다. 이 지역 대학들은 왜 사려가 부족한지 모르겠다. 대학의 역할은 두고라도 자식들 등록금 대다가 등골 빠진 사람들 아닌가. 국가사회이든 지역사회이든 생기를 잃으면 불 꺼진 공동체다. 저들을 그냥 두어서는 희망이 없다.
金 成 奎(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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