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낙동·백두를 가다]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

▲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고 있는 목판. 안동의 정신이 담겨져 있는 목판 10만본은 안동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고 있는 목판. 안동의 정신이 담겨져 있는 목판 10만본은 안동이 한국정신문화의 수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동의 관문에는 대형 광고판이 서 있다. 공통점이 있다. 바로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글씨다. 왜 안동은 정신문화의 고장도 아닌, '수도'라는 표현까지 쓰고 있는 걸까?

안동이 천년의 도읍지요, 고려왕실의 앞마당이었다는 사실을 체험한 일행에건 수도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았다. 안동의 수도론은 물건 찍듯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천년의 세월이 안동의 정신문화 수도를 빚어낸 것이 아닐까?

일행은 천년 전 안동으로 돌아갔다. 학가산 인근의 봉정사를 '수도 이야기'의 시작점으로 잡았다.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극락전으로 유명하다. 봉정사는 봉화의 축서사, 영주의 부석사(화엄종찰)와 함께 '화엄라인'에 있다. 화엄종은 통일신라와 고려의 통치이념이었다. 의상과 원효가 화엄종의 양 거두다. 원효는 통일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통치이념을 설파한 반면 의상은 안동을 거점으로 지금의 경북 북부지방에서 사찰을 짓고 백성들에게 화엄사상을 전파했다.

안동댐 가는 길 철로변에는 벽돌로 쌓은 전탑이 있다. 전탑은 화엄사상이 녹아든 탑이다. 안동에는 무려 3개의 전탑이 있다. 무슨 의미일까? 의상과 전탑은 당시 국가 통치이념인 화엄사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모두 안동에 그 중심을 둔 것이다.

또 안동은 삼태사를 중심으로 고려를 개국했다. 삼태사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려 개국의 공을 안동인들에게 돌려 안동 선비정신의 원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려 충렬왕과 공민왕이 안동에 임시 수도를 정한 것 역시 안동에 국가 통치의 정신적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후삼국을 거쳐 고려 때 정치·경제·행정의 수도가 개경(지금의 개성)이었다면 정신적 수도는 안동인 것이다.

김휘동 안동시장은 "정치적으로 해석할 때 고려의 안동이 지금의 여당이었다면 조선의 안동은 야당, 저항의 땅으로서의 정신문화수도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조선의 통치이념은 성리학으로 대변되는 유교이다. 성리학은 퇴계 이황으로 대표된다. 퇴계가 바로 안동인이다. 퇴계는 안동에서 성리학을 집대성했고 수천, 수만의 후학을 배출하면서 조선의 통치이념을 세우고 다졌다.

그런데 왜 조선에 들면서 안동은 고려왕실의 앞마당에서 조선 왕실이 가장 경계하고, 조선에서 가장 멀어진 곳으로 급변했을까?

성리학의 이념 중 하나인 예(禮)를 볼 때 조선은 개국부터 이를 어겼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는 과정은 부도덕한 측면이 강했고, 그의 아들인 태종 이방원은 권력다툼 끝에 형제를 죽였다. 세조 수양대군은 형의 아들인 단종을 왕좌에서 끌어내렸고, 조선 중기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조선 왕실의 처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응'한 곳이 바로 안동이다. 유교적 측면에서 안동은 예와 도덕을 충실히 이행했지만 권력을 가진 임금의 입장에선 바른말을 하는 안동을 조선에서 가장 먼 곳으로 내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안동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과거 합격자 수가 웬만한 도보다 많은 819명이나 됐다. 하지만 벼슬에 나아간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과거에 나아가지 않은 석학들이 안동의 정신을 키운 것이다. 안동의 선비들은 벼슬보다는 향리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하고, 상호 교류를 통해 나라가 바로 가도록 걱정했다.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는 '영남만인소'가 보관돼 있다. 안동 사림 1만여명이 서명한 상소문이다. 영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선처를 호소한 상소로 당시 상황으로선 감히 언급조차 못할 일이지만 안동의 사림들은 영조의 처사에 정면으로 집단 대응한 것이다. 벼슬보다는 사람됨을 가르친 퇴계도 임금이 내린 140회의 벼슬 중 반 이상을 거절했고, 퇴계의 수제자 월천 조목 선생도 40년 동안 벼슬길은 4년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안동의 사림들은 서원과 서당을 짓고, 학문에 매진해 안동의 서원 수만 40개가 넘었다. 서원과 서당에서 조선의 정신문화를 다지고, 이를 백성들에게 설파했다.

또 안동 문화재의 70%가 종택·고택이라고 한다. 무엇을 말하겠는가. 오늘의 시청 역할을 한 종가를 중심으로 안동 정신이 형성됐고, 결국 나라의 정신으로 귀결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국가 통치이념은 바로 '독립'이다.

김 시장은 "안동은 독립운동을 가장 먼저, 제일 많이, 가장 오래 한 곳이다. 그 중심은 안동의 선비이자 혁신 유림들"이라며 "사상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라고 했다.

안동은 한국독립운동의 성지이다. 바로 1894년 갑오의병의 발상지이자 한국독립운동사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안동시내에서 임하댐 쪽으로 가다 보면 의성 김씨 종택이 있는 내앞마을 바로 옆에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있다. 입구 기념비에는 1천명의 독립운동가 이름이 적혀 있다. 전국에서 가장 많다. 이 중 국가유공자만 320명이다.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지금의 국무총리)인 이상룡, 초대 국민대표회의 의장(국회의장)인 김동삼, 민족시인 이육사 선생 역시 안동인이다. 한국 근대사 정신인 독립의 그 중심에 안동이 서 있는 것이다.

안동은 우리나라 천년 역사의 정신문화 수도였다. 정신문화 수도 안동은 오늘은 물론 미래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종규기자 안동·엄재진기자 사진 정재호

자문단 김휘동 안동시장·권두현 안동축제관광조직위원회 사무처장·박점석 안동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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