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대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라디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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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돼랑이' 노금호(사진 왼쪽)씨와 '백발할매' 박명애(56·여)씨가 방송 도중 서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
▲ 교통정보 생방송 중인 구정은 KBS 리포터. 10년차 경력이 그냥 생긴 게 아닐 정도로 방송에 여유가 있었다. 사진 아래는 현장 취재에 나선 구정은 리포터.
▲ 교통정보 생방송 중인 구정은 KBS 리포터. 10년차 경력이 그냥 생긴 게 아닐 정도로 방송에 여유가 있었다. 사진 아래는 현장 취재에 나선 구정은 리포터.

'라디오'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연상단어는 뭘까? DJ, 음악, 그리고 세련된 표준어와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 등.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저 목소리는 누굴까? 어떻게 생겼을까?"

라디오가 매력적인 이유는 듣는 이들의 청각을 자극, 상상력을 최대화해 감성을 일깨우기 때문일 게다. 대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라디오 방송 속 사람들을 만나봤다.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가 있듯 청취율이 낮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영화에서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역을 충실히 하는 배우가 있듯 돋보이지 않아도 라디오에서도 꼭 있어야 할 사람이 있다. '성서공동체 FM방송-백발할매와 돼랑이의 만만한 세상'과 대구KBS 구정은 리포터의 얘기다.

◆ 우리도 업계에서는 유명세를 탄다

"한달에 한번 녹음을 하는데요. 한번 녹음하면 한달간 재방송을 포함해서 네번 방송이 나가요."

지난 4일 오후 대구 달서구 신당동의 '성서공동체 FM 방송' 스튜디오는 고교 시절 본 듯한 교내 방송국 크기였다. 12㎡ 남짓. 5명의 제작진과 출연진이 들어가자 스튜디오는 이내 비좁아졌다. 하지만 꽉 차버린 스튜디오에 긴장감은 크지 않았다. 스튜디오 중앙에 앉은 두 사람. 하얀 파마머리의 옆집 아줌마 같은 중년여성과 씨름선수 같은 청년이 프로그램 진행자다. 낮게 말하면서도 싱글벙글인 이들은 '저번에도 봤잖아'라며 친숙하게 어깨동무할 수 있는 친구 사이 같았다. 그래서인지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오효심 PD는 뜸들이지도 않았다. 이광조의 '즐거운 인생'이 프로그램 시작 노래로 바탕에 깔렸다. 시그널 음악이 흐르고 녹음이 바로 시작된 것이었다.

"백발할매와 돼랑이의 만만한 세상! 봄이 왔는데 아직도 마음속은 겨울입니다. 기름값은 오르고…"

길지 않은 몇 마디에는 사투리가 잔뜩 묻어 있었다.

"노래부터 듣고 갈까요. 에에, 달빛요정 만루홈런의 스끼다시 내 인생, 이기 노래제목인지 가수이름인지 헷갈린다카이까네. (으허허허)."

아줌마의 진국 사투리는 마이크를 타고 녹음기 속으로 그대로 빨려들어갔다. 노래가 흘러나오자 잠시 이어폰을 벗은 아줌마는 "내가 맨날 더듬거리가꼬 우짜노"라며 "눈이 안 좋아서 그렇다"며 분위기를 돋웠다.

그렇다고 방송사고이거나 NG는 아니었다. 한달 만에 하는 녹음이라 지난달에 어떻게 했는지 까먹기 일쑤. 심지어 '마이크 울렁증'까지 생긴다. 몇 차례 버벅이다 다시 녹음에 들어가도 오 PD는 "편하게 하라"며 여유를 줬다. 사투리를 더 자유롭게 쓰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고, 친근감이 있다는 게 제작진의 의도였다.

사투리가 넘실대고, 방송사고와 NG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방송을 대구시민들이 듣기는 쉽잖다. 이들의 방송을 듣기 위해서는 굳이 성서지역으로 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 대구 달서구 성서지역에서만 잡히는 주파수 FM 89.1㎒는 4년째 성서지역을 떠다니는 전파로, 이 인근을 지나지 않으면 듣기 힘든 소출력 라디오 방송이다. 이곳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전파를 타는 '백발할매와 돼랑이의 만만한 세상'(첫째주 낮 12시~오후 1시, 둘째~마지막주 오전 7~8시)은 지난해 '공동체 라디오 어워드'에서 작품상을 받았을 정도로 내용을 인정받은 프로그램이다. '공동체 라디오 어워드'는 전국 8개 소출력 라디오 방송 시범사업자들이 제작한 프로그램 중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에 주어지는 상.

◆ 12㎡도 전파를 타면 세상과 통한다

녹음이 끝나도 방송용과 일상 언어의 구분은 없었다. 진행을 맡은 두 사람은 '백발할매' 박명애(56·여)씨와 '돼랑이' 노금호(28)씨. 대구와 포항이 각각 고향인 두 사람은 '표준어 사용이 낯 간지러워' 유려한 사투리를 자랑하고 있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진행자 둘 모두 지체장애 1급이라는 것. 특히 노씨의 족히 100㎏을 넘는 덩치는 전동휠체어를 가렸다. 무엇보다 밝은 두 사람의 얼굴에서 지체장애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지난해 4월부터 '장애인의, 장애인에 의한 방송'을 만들어온 만큼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전동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대구 전역을 돌아다니는 이들은 "장애인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곳이 이곳뿐이어서 1시간 넘게 휠체어를 타고 여기까지 온다"고 말했다.

특히 박씨에게 이 프로그램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일깨워준 방송이기에 애착이 남다르다고 했다.

"나이 마흔일곱에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제가 처음으로 바깥 세상과 접할 수 있었던 게 장애인 야간학교를 통해서였어요.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배울 공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지금 제게 이 라디오 방송은 같은 의미거든요. 소출력이지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곳입니다."

기실 청취권역이 좁다 보니 청취자가 많은 것도 아니다. 온라인으로 들을 수 있는 '다시듣기' 조회 수도 20회 안팎. 이들은 "반향이 크지 않을 수 있지만 많이 듣지 않는다고 내팽개쳐 놓을 거냐"고 되물었다.

더욱이 이들이 이곳에서 더 열정을 불살라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올해부터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전국 8곳의 소출력 라디오 방송국에 지급하던 보조금을 끊으면서 방송이 존폐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단체 보조금과 방송통신위원회 보조금으로 운영비의 대부분을 충당해온 소출력 라디오 방송 시범사업자들은 8월이면 시범사업마저 끝나버린다. 이 때문에 두 사람도 "시한부 방송을 하는 것 같아 요즘은 방송을 할 때마다 더 잘하려고 애를 쓴다"고 했다.

노씨는 "우리가 돈을 받고 하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힘들어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못한다"며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더 그렇다. 방송을 할 수 있어 내가 다시 힘을 얻었고 자신감도 쌓였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이날 이들이 녹음한 방송내용은 변함없이 6일 오후 전파를 타 1시간 동안 청취자들에게 장애인들이 바라보는 대구의 모습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온라인으로는 다시듣기(http://www.scnfm.or.kr)로 들을 수 있다.

◆ 대구 곳곳의 목소리를 전한다

5일 오후 2시 대구 수성구 파동에서 만난 구정은(33·여)씨는 취재에 나선 길이었다. 대구KBS 뉴스와이드 2부 '현장리포트'에 들어갈 현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 구씨가 다다른 곳은 파동의 한 허름한 사무실. 격앙된 듯한 파동주민 10여명이 금세 구씨를 에워쌌다. 전날 미리 연락해 두고 찾아갔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있었던 탓이었다. 촬영카메라는 없었지만 일부 주민은 정장 차림이었다. 방송국에서 간다고 하면 으레 카메라부터 떠올리는 게 시민들의 선입견. 대신 구씨는 메모리카드 녹음기를 내밀었다. 말이 좋아 녹음기지, 두툼한 책처럼 생긴 녹음기계가 꽤 무거워보였다. 하지만 주민들의 목소리를 놓칠세라 마이크를 시종일관 주민들의 입으로 들이댔다.

구씨가 이날 취재한 내용은 '상인-범물 간 4차 순환도로 건설에 주민과 대구시 사이에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 주민들의 울분은 구씨가 내민 마이크 앞에 거침없이 쏟아졌다. 이날 구씨가 녹음한 분량은 30분 남짓. 하지만 정작 방송에 실릴 내용은 4분이 전부라고 했다. '현장리포트'가 8분 안팎에 매조져야 하는 코너라 분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 짧은 시간 내에 주민들의 봇물 터진 얘기를 담으려면 편집은 필수, 사전지식을 알아 두고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구씨는 "현장에 나가면 취재기자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구씨의 말처럼 파동 주민들은 구씨에게 "우리같이 힘없는 사람들한테 귀기울여주는 높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40분 정도가 지나자 구씨는 자리를 뜰 준비를 했다. 평소보다 빨리 마친 것이라고 했다. 특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관공서에서 들어주지 않았을 뿐 언제든 이야기할 준비가 돼있는 주민들이었기에 청산유수로 말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 이야기하는 속칭 '섹시한 멘트를 많이 따서' 편집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늘 이렇게 잘 풀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유사휘발유를 파는 가게에 담당 공무원과 현장 동행 취재를 함께 나갔지만 현장을 급습하지 못해 3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1시간 안팎에 끝난다고 했다.

이런 구씨의 경력은 10년. '현장리포트'를 맡은 지도 벌써 5년째였다. 리포터 중에서는 고참에 속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통상 32세가 넘으면 퇴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은 경험을 더 중요시한다"는 게 구씨의 첨언이었다.

◆ 좀 더 많은 이들이 도전했으면…

구씨가 흥미를 느끼는 일은 현장 냄새가 나는 일. 최근에는 '전사자 유가족 찾기 채혈행사'와 '상수도 보급이 안 되는 팔공산 적운마을'을 취재했다.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녹음해 편집하면서 여전히 희열을 느낀다는 구씨. 특히 약자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그걸 공중파 방송으로 내보낼 때 구씨의 기쁨은 배가된다고 했다. 하지만 구씨의 오래된 업무 중 하나는 교통정보를 전달하는 일. 파동에서 취재를 마치기 무섭게 대구경찰청 교통정보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대구경찰청 본관 건물과 50여m 떨어져 있는 교통정보센터는 대구시내 교통상황을 한눈에 알 수 있는 곳.

교통정보 전달은 특히 순발력이 발휘되는 일. 대구시내 주요 교차로마다 설치된 CC-TV를 조정해 교통상황을 파악, 생중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 CC-TV에는 일련번호가 있었고 구씨는 당연하다는 듯 번호를 죄다 외우고 있었다. CC-TV를 조정하는 키보드 사이로 손가락이 풀쩍풀쩍 널뛰듯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CC-TV를 휘어잡고 방향도 이리저리 돌리길 여러번. 구씨는 "대구시내를 운전하다 CC-TV가 마구 돌아간다면 분명 리포터들이 돌리고 있는 거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때문에 접촉사고가 나 운전기사들끼리 내려서 싸우는 장면은 흔히 볼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목격돼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구씨가 맡고 있는 일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가요프로그램의 '행복탐방'이라는 주민참여 코너의 리포터도 맡고 있었다. 방송분량이 4분 정도지만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 원고도 써야해 "나도 반(半)은 방송작가"라고 말했다.

오후 5시 53분 30초가 되자 회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길지 않은 통화였다.

"스텐바이(준비)하세요. (뚝)"

방송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말이 맞았다. 그래도 10년차 구씨가 교통정보 방송시간인 1분을 위해 준비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때부터 구씨는 쉴새없이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혀를 입 밖으로 뺐다 넣었다를 반복했다. 1분 안에 주요 도로의 소식을 청취자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사전준비 작업. 56분 30초가 되자 간단하게 메모를 했다. 57분 혼자서 뭐라고 말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생방송일줄이야. 1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훌쩍 지나갔지만 구씨는 CC-TV 이곳저곳을 보면서 여유를 부렸다. 1분의 생방송을 마친 구씨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구씨는 "결혼을 한 뒤에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 나는 '리포터 체질'"이라며 자신있게 정체를 드러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직업에 대한 무한 애정을 표시했다.

"실력이 없어서 리포터를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오히려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자율성도 많은 곳이 리포터의 세계랍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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