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갤러리에서 만납시다

세상이 춥다. 올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5천달러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고, 최악의 경우 2007년의 절반 수준인 1만달러를 겨우 넘긴다고 한다. 어찌 됐건 상관없다. 1만달러라면 4인 가족 기준, 일년에 4만달러라는 얘기다. 현재 환율 달러당 1천500원쯤으로 계산해 보니 무려 6천만 원이다. 하지만 통계는 통계일 뿐.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라고 한들 언제 그만큼 벌어본 적은 있었나. 아껴 쓰고 줄여 쓰는 수밖에. 역사상 극복되지 않은 경제 위기는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시간이 문제다. 기다림에는 혹독한 인내가 따르고, 인내는 바닥도 없는 불안감에 흔들린다. 뻔한 소리에 진리가 담겨 있다. 소중한 말이니 여러 사람이 되풀이했을 것이고, 자주 듣다 보니 뻔한 소리가 됐지만 진리는 진리다. 이럴 때일수록 '여유를 갖자'는 소리를 하고 싶어 장황하나마 말을 보탰다.

이른 봄볕이 따스한 주말, 공원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여유를 갖자는 금언을 몸소 실천하는 소중한 분들이다. 찡그린 얼굴 없이 하나같이 환한 표정이다. 여유는 생기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돗자리 하나 펼 곳 없이 가득 찬 공원 옆에 자리 잡은 대구문화예술회관은 봄을 맞아 전시회가 한창이었다. 지역의 내로라하는 화가 37명이 내놓은 작품도 있었다. 하지만 한산했다. 평소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지만 문 밖에서 북적거리는 인파를 감안하면 아무래도 텅 빈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아쉬웠다. 가까운 동시에 까마득히 멀게 느껴지는 것이 그림이다. 보고 즐기는, 지극히 1차원적인 '여유'의 대상이 바로 그림이지만 지금껏 그렇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어렵기 때문이다. '도대체 뭘 그린 거야' '저게 무슨 그림이야'라는 체념과 조롱까지 나온다. 그림은 음악과 많이 닮아있다. 장르도 다양하고 표현 방식도 제각각이다. 클래식과 재즈가 어렵다면 가요와 팝송을 들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귀에 착 감기는 클래식이나 재즈 한 곡쯤 만날 수도 있다. 그림은 말을 걸어온다. 때로는 쉬운 단어만 골라서 또박또박 말을 건네기도 하고, 가끔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를 내뱉기도 한다. 마음껏 떠들어보라며 그저 여유롭게 지켜보면 된다.

미술과 미술시장을 혼동하는 것도 전시장을 멀어지게 한 이유다. 언론을 통해 수억원짜리 그림과 경매에서 천문학적인 가격을 기록한 작품 소식들만 접하다 보니 어느 새 그림은 우주 저 편 안드로메다로 달아나 버렸다. 속된 말로 '있는 자들이나 누리는 호사'쯤으로 그림이 치부되는 형편에 이르렀다. 그림을 갖는 것과 그림을 즐기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소유의 여유와 감상의 여유를 한데 뒤섞어 놓았으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갤러리에 들어가서 한나절을 죽치고 앉아 그림을 본다고 해서 내쫓는 사람 없다. 서울 다음으로 갤러리가 많다는 대구. 한 갤러리에서 만난 가족의 대화로 끝맺음을 하자. 등 지고 돌아누운 여인의 누드화를 본 딸이 말했다. "아빠, 저 아줌마는 왜 옷도 안 입고 자? 화난 일이 있나?" 아빠는 웃으며 말했다. "글쎄, 네가 한 번 물어보렴".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딸이 대뜸 이렇게 답했다. "나랑 얘기하고 싶지 않은가봐. 돌아보지도 않잖아." 갤러리 곳곳에서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수용 문화부 차장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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