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양녕이 충녕에게 왕위 양보? 글쎄…

왕이 못된 세자들/함규진 지음/김영사 펴냄

양녕(조선 태종의 맏아들)은 원자와 세자에 책봉됐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가 앉기로 돼 있었던 옥좌에는 동생(충녕대군으로 후에 세종대왕)이 앉았다. 후세 사람들은 '동생에게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양녕이 일부러 미친 짓을 해 왕위를 동생에게 양보했다'고 말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 권력의 세계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다. 정말 그랬을까?

아들을 셋이나 잃었던 태종은 넷째 아들 양녕이 건강하게 자라자 지극히 사랑했다. 게다가 아버지인 자신을 닮아 기골이 장대하고 무골적인 기질이 강했다. 그래서 더 기뻤다. (남자들은 대체로 아들이 자신을 많이 닮을수록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양녕은 타고난 기질상 공부보다는 밖으로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자신을 닮은 점은 기뻤지만 왕이 되려면 공부를 더해야 했다. 태종은 아들에게 더 많이 공부할 것을 요구했고, 공부가 미흡하다 싶을 때는 시강원 관원들에게 매를 대며 분발시킬 것을 주문했다. 아직 어렸던 양녕은 아버지가 꾸중할 때면 밤을 새워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양녕은 근본적으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읽기보다 밖으로 나가 말 달리고 활쏘기를 좋아했다. 그 자신 무인 기질과 문사 기질을 겸하고 있던 태종도 걱정은 했지만 크게 문제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양녕은 문제가 많았다.

태종 10년(1410),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만나 봉지련이라는 기생과 염문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세자의 만행은 점점 강도를 높여갔다. 몰래 궁궐 담을 넘어 여자를 찾아갔고, 여자를 궁궐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초궁장이라는 기생과도 관계했는데 자신의 숙부 뻘인 정종의 여자였다. 매형인 이백강과 관계가 있던 칠점생이라는 여자와도 놀아났다. 아들의 문란한 생활에 태종은 세자의 측근들을 벌주거나 상대 여자들을 처벌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세자는 측근들이 처벌을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자신과 놀던 여자들의 구명을 위해서는 단식 투쟁까지 벌였다.

급기야 아버지 태종은 세자의 여자 문제를 직접 나무랐다. 이에 양녕은 '부왕께서는 하시는 일을 왜 저더러는 못하게 하십니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태종의 피를 거꾸로 돌게 했다. 태종은 세자의 비행을 도왔다는 이유로 사돈인 김한로를 귀양 보냈다. 빈궁을 사가로 내치는 조치도 취했다. 그럼에도 양녕은 변하지 않았다. 서연(왕세자의 공부)을 무단으로 폐하고 활쏘기를 다녔고, 아프다는 핑계로 태종에게 문안도 가지 않았다. 처가로 쫓겨나 반성문을 쓰고 돌아온 후에도 행실을 고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유만으로 태종이 세자를 폐하고 왕위를 셋째에게 물려준 것은 아니다. 태종은 맏아들을 지극히 사랑했고 그래서 고민했다.

'호탕한 기질의 세자가 글 공부보다 여색과 사냥에 빠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나라를 지킬 것인가…. 말 안장 위에서 권력을 얻을 수는 있지만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보다 수염 허연 학자들과 친해야 한다.'

당시 조선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 교체기를 돌파하느라 선비들이 등을 돌린 형국이었다. 선비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왕조는 망하기 마련이다. 양녕은 아무래도 무골이었다. 태종은 맏아들 양녕을 그렇게 아꼈지만 왕위를 얌전한 충녕(세종)에게 넘겼다. 태종 18년(1418)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양녕대군이라고 하고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양녕이 충녕(세종)을 깊이 아껴 일부러 왕위를 양보했다는 이야기에 대해 이 책은 다르게 본다. 양녕이 충녕을 좋아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충녕이 라이벌로 성장하자 싸늘하게 대했다.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왕의 재목이 아닙니다.' 아버지 태종에게 양녕이 직접 고한 말이다. 양녕이 다른 사람의 아내인 어리를 꾀어내 간통하고 임신까지 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 일 역시 폐세자의 한 원인이었다. 마산역 앞 노상에서 충녕을 만난 양녕은 화를 내며 '어리의 일을 반드시 네가 아뢰었을 것이다. 그렇지?' 라고 물었고 충녕은 답하지 않았다.

이 책은 조선 왕조 27명의 세자 중 12명이 왕이 되지 못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일찍이 온 세상을 약속 받았으나 끝내 옥좌에 오르지 못한 12명의 세자들. 그들 중 5명은 살해되거나 폐위됐고, 6명은 병사했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왕조가 망해버렸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조선 최초의 세자였던 의안대군 이방석은 이복형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청나라에 8년 동안 볼모로 잡혀 있다가 돌아온 소현세자는 냉혹한 아버지의 의심을 받던 와중에 의문사했다. 귀국하고 두 달 만이었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손에 죽었다.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11살 때 일본으로 보내졌고, 일본 황족과 결혼해 일본군 중장의 신분으로 살았다.

이 책은 책임과 의무로 꽉 짜여진 세자들의 일상에 대해, 끝내 왕좌에 오르지 못한 그들의 운명에 대해, 2인자였기에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딛어야 했던 그들의 위험하고 우울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64쪽, 1만1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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