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이라는 것은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기록하여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래서 학습 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인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탄생 이후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여타 동물들과는 다릅니다. 다양한 문자와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갓 태어난 개체일지라도 앞선 세대의 경험더미 위에서 출발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경험을 단순히 시간의 축적물로만 쌓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고 분석하여 그 경험들의 가치를 배가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학습 능력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한 경험, 성공한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리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실패의 이유와 성공의 조건들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공유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학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로 사고 발생 6주기를 맞는 2·18 대구지하철 화재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사고를 겪은 당사자와 피해자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이미 우리들 대부분의 기억에서 그 사건은 잊혀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지하철을 타고 다닙니다. 그것은 바로 학습을 가능하게 한 역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홍원화 교수입니다. 지하철 참사 2주기를 맞았을 때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 전동차를 탔던 생존자를 찾습니다'는 문구가 신문지상에 등장했습니다. 경북대 도시환경설비연구실의 홍원화 교수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ecocity.knu.ac.kr)에 팝업창을 띄우고, 기자들에게 간곡히 요청하는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기록과 교훈'(119매거진, 2005)이라는 단행본이 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화재 당시 전동차 1079, 1080호에 탑승했으나 조기 탈출로 피해를 입지 않은 생존자들에게 주목했습니다. 그동안 세인들의 이목은 부상자들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피난했던 사람들을 찾아 생존의 지혜를 학습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선 홍 교수는 석·박사과정 학생 2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조사단을 꾸리고, 지하철 참사 부상자 148명 중 101명을 직접 인터뷰했습니다. 상황에 대한 기본조사를 거친 후, 긴박한 순간에 탑승객의 생사(生死)를 가른 요인이 무엇인지 밝혀내기 위해 생존자들의 대처 방식과 탈출 경로를 추적했습니다. 화재 연기로 인해 가시거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황, 피난자들은 벽을 짚거나 앞 사람의 옷과 신체를 잡으면서 이동했습니다. 그들이 방향을 감지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유도등과 광고판 불빛이었습니다. 비상 유도등은 전기가 단전되고 연무 가득한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좁은 승강장의 폭도 문제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자 병목 현상이 일어나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증체 발생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지하철 차량의 급속한 연소 확대도 한 원인이었는데, 인화성이 강한 내장재가 문제였습니다. 피해를 입지 않은 생존자가 1079호는 460~500명, 1080호는 250명 내외가 된다고 추정한 저자는 이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시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신속한 대피'가 최대의 관건이었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생존자 대부분은 사고 지하철에서 흘러나온 '기다려 주십시오'라는 안내방송을 4차례나 들으며 앉아 있지 않고 즉시 빠져나온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지하철 화재와 같은 상황이 재발하지 않도록 제대로 학습하자는 목적에서 진행된 홍원화 교수의 연구는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왜 비상 유도등이 무용지물이었는지,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쉽게 연소되지 않도록 하려면 내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안내 방송이 사람을 죽게 만드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긴급상황 대응 매뉴얼과 현장 훈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재난 대비책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활인이라면 반드시 명심해야 할 재난대응 매뉴얼을 정형화한 것입니다. 결론부에서는 건축 전문가로 돌아가서 견해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설계 때부터 재난 발생에 대비할 수 있는 방재 시스템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와 그 방법론이 그것입니다. 학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노동일(경북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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