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11) 개신교의 성지 동산

동산의료원이 있는 동산(東山)은 야트막한 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무연분묘가 흩어져 있던 헐벗은 황무지였다. 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 선교사와 동산병원의 전신인 제중원을 설립한 존슨 선교사가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이 땅을 매입하였다. 그 뒤 학교'병원'신학대학이 들어서면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기지로 활용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 추가로 동산과 주변의 농지를 사들였다. 지금의 동산과 계성학교 일대의 땅으로 동산병원, 병원 사택, 계명대, 계성학교, 신명학교, 제일교회, 선교사 주택 같은 건축물들이 들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일교회는 대구 최초의 기독교 예배당으로 1994년 100주년을 맞았다. 1893년 선교사 베어드가 처음 약령시를 방문하고 선교하였다. 초창기 예배당 이름은 야소교회당(耶蘇敎會堂)이었고, 두 번째 예배당 이름은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였으며, 그 후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2년 한국의 전통 양식과 서구의 양식을 절충한 세 번째 교회 건물을 지었다. 종탑부가 볼 만하다. 1층에서 5층까지의 창문이 제각기 다르게 설계됐고, 윗부분에는 팔각형의 뾰족탑을 세웠다. 그 같은 특성과 역사성을 감안, 1992년 본당과 종탑이 대구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지금의 자리에다 새로운 건물을 지어서 옮겼다.

신명학교는 대구 최초의 여자학교이다. 190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부루엔의 부인(한국명 부마태)이 남산동의 사택을 교사로 삼아 개교하였다. 1912년 이금례 박연희 임성례 세 사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1937년 6월 미국의 교육자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1968)가 수행원과 함께 학교를 방문, 강연하였다. 그녀는 "미래의 역사를 짊어질 신명의 딸들이여, 꿈을 가져라. 하나님이 택한 딸로서 재능을 살려 아름다운 작품이 되라"고 역설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조선의 아름다운 풍경과 사람들의 인정을 극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산의료원은 1999년 개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그에 맞춰 병원 관사로 사용하던 스윗즈(Switzer) 주택은 선교박물관, 챔니스(Chamness) 주택은 의료박물관, 블레어(Blair) 주택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뒤이어 교육'역사박물관 2층에 민족독립운동 사료를 중심으로 '대구 3'1운동 역사관'을 개장함으로써 근대사 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곳의 건축물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을 뿐 아니라 푸른 담쟁이덩굴이 건축물을 뒤덮고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동산맨션의 오른쪽에 아흔 개의 오르막 계단이 있다. 이곳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호젓한 골목길이다. 곧장 가면 제일교회와 담을 경계하면서 동산의료원에 이르고 의료원 내부 정원과 만나는 곳에 '대구 3'1운동 길'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그 연유는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이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의료원 솔밭에 모여서 서문시장으로 몰려간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워 놓았다. 이처럼 대구 3'1운동에 말없이 이바지한 곳이지만 지금은 그 옛날의 우거진 소나무 숲도, 그 속에 있었던 오솔길도 모두 사라지고 없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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