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도 많이 했습니다. 죽고 싶었던 적도 많았죠. 그래도 희망은 있지 않습니까!"
시사만화가 마태식(50)씨는 지체1급 장애인이다.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몸이지만 성인이 된 후에는 '희망'을 버려본 적이 없다. 요즘 불황으로 자신의 벌이가 시원찮고 주변 환경도 어려워졌지만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한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 두 다리의 기능을 거의 잃어버렸다. 휠체어가 뭔지도 모르던 시기였다. 가난한 형편에 특수학교를 갈 수도 없었다. 누나가 학교까지 업어다 주어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마저도 어려워졌다. 그의 학업은 여기서 중단됐다. 마씨는 "당시엔 누가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화부터 냈다. 아마 자격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의 끝은 아니었다. 그는 대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신체 장애 때문에 비록 포기하긴 했지만 우주물리학자의 꿈을 키울 수 있었던 것도 엄청난 독서량 때문이었다. 만화도 독학으로 배웠다. 과일가게를 했던 선친이 나무상자 밑에 깔린 외국 신문의 만화를 챙겨주면 이를 베껴 그리기도 했다.
1980년. 시국은 어두웠지만 그에겐 빛이 찾아왔다. '장애인의 해'라고 정부에서 휠체어를 무료 지급해 주었다. 그에게도 이제 자유롭게 이동할 수단이 생긴 것이었다. 그해 여름에는 주간지(선데이서울)에 자신의 만평이 실렸다. 이후로 각종 대회에서 입상했다. 20대 초반 지인의 도움으로 도장 가게를 차리면서는 살림살이도 나아졌다. 일반 봉급 생활자의 2~3배를 벌었다. 드디어 찾아온 전성기. 그러나 IMF 이후 이마저도 힘들어졌다. 만화 의뢰도 거의 없고 도장 가게도 이제는 유명무실하다. 아내의 인쇄업도 어렵기는 마찬가지. 그는 "아내나 아이들한테 면목이 없다"고 했다.
한 가지 소득은 있었다. '장애인 인권운동'에 대해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는 10여년 전 친구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로 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렀다가 경사로와 장애인용 화장실을 이용하고 난 뒤 자극을 받았다. "다른 장애인들이 힘겹게 싸운 결과로 이런 편의시설이 생겼는데 정작 나는 무엇을 했는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로 그는 자기보다 더 장애가 심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장애인 인권 개선, 특히 '보행권 확보'에 매진하고 있다.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장애인의 이동권을 제약하는 요소들을 찾아내고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관계기관에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마씨의 희망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아 통합교육의 중요성을 꾸준히 설파하고 있다. 꿈도 있다. 두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생계 안정이 그 첫번째. 그리고 혼자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후원자만 있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다"고 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즉석에서 부탁해 그린 만평 속에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두 '행복의 나라'로 향해 가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바로 숱한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희망을 안고 살아가는 마씨가 꿈꾸는 세계였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이재명, '선거법 2심' 재판부에 또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