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난 문화 향기 보균자" 신종원 대구 서부도서관 관장

▲ 대구 서부도서관에 마련된 향토문학관 모습.
▲ 대구 서부도서관에 마련된 향토문학관 모습.

지금 대구 서구에는 문화의 향기가 퍼지고 있다. 바이러스가 번지고 있다. 진원지는 서부도서관. 신종원(58) 관장이 향기 바이러스 보균자다. 바이러스 유포의 주범이기도 하다. 신 관장은 이 바이러스를 도서관에서 서구로, 나아가 대구 전체로 퍼뜨리려는 '발칙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

신 관장의 꿈은 지역민들이 모두 문화의 향기에 감염되는 것이다. 시와 소설을 읽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감상하며 그 향기에 흠뻑 젖는 것. 향기에 젖은 주민들이 그 향기를 서로 나누고 얘기하고 소통하는 것. 그래서 단절과 갈등의 사회가 정서적 일체감과 공동체의 소통하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그의 음모이자, 꿈이다.

그의 음모는 30여년간 계획되고 진행돼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향토문학관, 책읽기 운동, 각종 박물전, 초청 강연회 등은 바이러스 유포 수단이다. 서구 주민 상당수는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서부도서관은 학생들의 공부방 역할만 하는 전통적 도서관이 아니라, 주민에게 활짝 열린 공간이다.

신 관장은 지난 1977년 학생도서관(현 대구도서관)에 발을 디딘 이후 지금까지 32년 동안 도서관에서만 일해 온 '도서관 우먼'이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대구에 도서관이 몇 개 없던 시절, 그는 학생도서관에서 서예교실 한문교실 교양강좌 등을 통해 주민들이 함께할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의 시동을 걸었다.

2001년 서부도서관에 처음 관장으로 부임했을 때 지역 문학인 몇명의 사진이 내걸린 '향토문학코너'를 보고 향토문학인들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한국 근현대문학을 이끈 주역이 향토문학인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되지 않고 있다는 데 놀랐다. 결국 발품을 팔아 '향토문학코너'를'향토문학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문학과 문화에 열정은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공간과 시간에 집중되고 있다. 2001년과 2002년 도서관 로비에서 '이상화 탄생 100주년 기념전' '백기만 탄생 100주년 기념전' '소리박물전' '곤충박물전' 등을 열어 주민과 어우러졌다. 두류-서부-효목-서부도서관으로 이어진 도서관장 10년 동안 '시낭송회' '동화 구연' '책과 함께하는 퍼포먼스' '독서치료' '독서왕 선발대회' 등 문학바이러스 유포는 계속됐다.

지난해 7월부터는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을 시작했다. '서구는 지금 독서 중, 책으로 하나 되는 행복도시'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한 지역 주민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한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며 공동체 의식을 쌓자는 취지였다. 도서 선정위원 구성, 책 선정, 북클럽(독서 동아리) 모집, 독후감 공모와 시상, 작가 초청 강연회 등을 통해 이 운동은 이제 서부도서관에서 대구 전체로 점차 확산되고 있다. 그는 대구시민 모두가 문학과 문화의 향기로운 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신 관장에게서 젊은 문화의 향기가 짙게 배어났다.

◆닫힌 도서관에서 열린 문화공간으로

-30년 전 도서관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70년대 후반 대구엔 학생도서관을 포함해 도서관이 2개밖에 없었지요. 지금은 사설도서관을 포함해 15개가 훌쩍 넘었지만…. 당시 도서관 고객들도 성인은 거의 없었고 수업 후 책가방을 들고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이 대다수였죠. 그래서 시작한 게 서예교실, 한문교실이었지요. 교양 강좌를 통해 일반인들이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도서관에서 어떤 일을 주로 했나요?

음악감상과 영상물 상영은 학생들의 많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경북도교육연구원에서 영사기를 빌리고, 대구 미문화원에서 자료 테이프를 가져와 교양물이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지요.

학생들에게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고령 등 대구 근교에서 2박3일 '문학의 밤' 행사도 가졌습니다. 학교 독서동아리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셀로판지를 붙여가며 시낭송, 연극, 장기자랑 등으로 서투른 행사를 치렀는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그때 아이들이 지금은 중년이 됐는데, 그 추억이 지금 문학에 대한 관심이나 문화생활에 조금이라도 밑바탕이 됐으면 큰 보람이지요."

◆풍부한 향토문학의 유산을 계승해야

-지역에서 유일하게 향토문학관을 설립했는데?

"2001년 서부도서관에 와보니 도서관 구석에 '향토문학 코너'란 게 있었습니다. 지역출신 문인 몇 명의 사진이 걸려 있는 게 고작이었지요. 그래서 대구를 둘러봤지요. 근현대 한국문학을 이끌었던 지역 출신 문인들이 숱하게 많은데도 향토문학관이 없더라고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인들도 이 점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조지훈 이장희 이육사 이상화 현진건 이호우 김동리 박목월 백기만 등 근현대 문학의 거장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지 않습니까."

-문학관은 어떻게 꾸렸습니까?

"예산과 자료가 우선 필요했습니다. 교육청을 통해 어렵게 예산을 구했고, 향토 문학인들의 옛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했지요. 시, 소설, 수필 등 작품을 고서점을 통해서 구하고, 지역작가들의 소장 작품을 기증받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육필원고, 편지, 사진, 작품집, 유품 등을 모으고, 연대표도 만들었습니다. 소설가 윤장근 선생이 소장하던 향토문학 자료도 기증받았습니다.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유산과 묻혀 있는 자료를 제대로 발굴, 보존해 계승하는 것도 그만큼 소중하다고 봅니다."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은 소통과 공동체 사회를 지향한다

-지난해부터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4~5년 전부터 생각해오다 작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지요. 독서 운동은 도서관인으로서의 당연한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운동은 지난 1998년 미국 시애틀에서 시작됐지요. 이후 시카고는 이 운동을 통해 상당한 성과를 냈습니다. 도시의 주요 문제인 인종갈등과 차별 문제를 다룬 '앵무새 죽이기'란 책을 읽고 토론하는 운동을 통해 지역사회의 화합에 상당한 기여를 했습니다."

-이 운동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무엇입니까?

"최근 경제적 어려움과 내적 갈등으로 지역사회는 물론 국가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지역 주민 모두가 한 권의 책을 같이 읽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면서 인적 네트워크도 형성하고, 지역 통합도 이룰 수 있다고 봤지요. 결국 책읽기와 토론을 통해 밝은 사회, 건강한 사회, 공동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궁극적 목적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합니까?

"우선 도서 선정위원을 구성해 후보 도서를 선정한 뒤 주민 직접투표와 인터넷 투표, 선정위원 투표 등을 종합해 최종적으로 책을 골랐습니다. 다음엔 북클럽을 조직했습니다. 지난해 지역 기관단체의 도움과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10명 내외로 모인 북클럽이 21개나 조직됐습니다. 이들 회원들에게 책을 나눠주고 읽게 한 뒤 '내 마음의 밑줄 긋기'란 제목으로 독후감상문을 받았습니다. 작년에는 작가 박범신의 '촐라체'를 선정했습니다. '촐라체'는 이복형제가 로프 하나에 몸을 의지해 히말라야 한 봉우리인 촐라체 등반을 하면서 겪었던 조난과 생환의 사투를 그린 작품입니다.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팍팍한 요즘,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을 던져주는 좋은 작품이지요. 작가 초청강연회도 가졌습니다. 작가는 '서구는 지금 독서 중, 책으로 하나 되는 행복도시'란 슬로건에 동감하며 흔쾌히 초청에 응했습니다. 300석 좌석이 주민들로 가득 찼고, 직원들은 서서 강연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강연 뒤에는 작가와 주민들이 열띤 논의도 벌였습니다."

-이 운동이 확산될 수 있을까요?

"옷에 물이 서서히 스며들 듯 퍼져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주민들의 의식과 자발적 참여가 관건입니다. 이미 작년에 생긴 북클럽이 정기적으로 '미팅데이'를 하는 등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도서관에 '북카페'를 개설해 독서 동호회 회원들이 자주 만나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를 펴겠습니다. 주민들이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면서 소통하는 분위기가 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구에서 이 운동의 불을 지폈기 때문에 대구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문화 바이러스가 대구 전체로

-앞으로의 계획은?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이 대구 전체로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신진작가, 전도유망한 미술가들의 작품도 모아 전시를 하고 대여도 할 생각입니다. 다문화가족실도 만들어 다문화가정의 아이와 부모들과 함께 책읽어주기, 책놀이 등 '북스타트' 프로그램도 진행할 계획입니다. 희망사항으로는 대구 문학벨트가 조성됐으면 하는 것입니다. 대구는 문학의 고장입니다. 이상화 고택을 비롯해 향촌동 등 옛 골목문화, 향토문학관 등을 연결한 문학관광벨트의 조성이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마침 대구 중구가 주민 주도의 근대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한다고 하니 반갑습니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