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환율 계산이었다. 웬 뜬금없는 소리냐고 할 지 모르지만 주인공이 퀴즈쇼에서 탄 상금 2천만루피는 도대체 얼마나 큰 돈일 지 궁금했다. 관객들의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미리 알려주자면 인도 1루피는 현재(20일) 거래가로 27.18원. 주인공이 탄 상금은 우리 돈으로 5억4천360만원이었다. 영화에서 밝히듯이 무려 9천만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며 인도 전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는 조금 적은 액수가 아닐까 싶다. 로또 한 번 당첨되면 10억원이라는 돈이 오가는 우리 실정에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인도의 1인당 GNP를 생각해 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2003년 기준 460달러에 불과하다. 대략 계산해 봐도 우리나라의 40분의 1 정도 밖에 안된다. 체감하는 돈의 가치로 따져본다면, 그들에게 5억4천여만원은 216억 원의 가치가 있는 셈이 되겠다. 물론 단순히 GNP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니 옳다 그르다 따지지는 마시길. 아무튼 어마어마한 액수가 걸린 퀴즈쇼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빈민가 출신이 감히 어떻게
배경은 2006년 인도 최대의 도시이자 국제무역항과 국제공항이 있는 뭄바이(1995년 11월에 봄베이(Bomay)를 뭄바이로 개칭). 영화는 빈민가 출신의 18세 고아 소년 '자말 말리크'가 한 방송국의 인기 프로그램 '누가 백만장자가 되기를 원하는가?'(Who wants to be a millionaire?)에 출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동시에 자말이 한 경찰서 취조실에서 뚱뚱한 몸집만큼이나 심술이 뒤룩뒤룩 붙은 경찰관에게 뺨을 얻어맞는 장면과 교차한다. 빰맞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지켜보던 기자는 깜짝 놀라 뺨을 어루만졌다. 이야기는 이렇다. 이튿날 2천만루피에 도전하는 마지막 문제를 앞두고 방송국을 나서던 자말은 다짜고짜 경찰서에 끌려간다. 이유는 그 똑똑한 의사, 변호사, 교수들도 1만6천루피 상금이 고작이었던 퀴즈쇼에서 어떻게 책 한 권 읽은 적이 없는 일자무식쟁이에다 빈민가 출신의 슬럼독(Slum dog), 즉 '빈민가의 개'가 상금 1천만루피를 타는데 성공했느냐는 것. 방법은 모르지만 속임수임이 틀림없다는 판단이다.
구타와 물 고문에도 아무 말을 않던 자말은 전기 고문까지 받다가 급기야 정신을 잃는다. 자말을 취조하던 경찰관들은 "혹시 정말 정답을 아는 게 아닐까?"하며 한 줄기 의구심을 던지는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자말이 힘겹게 내뱉는다. "나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고. 경찰관과 마주 앉은 자말은 그제서야 자신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그 속에 퀴즈 정답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쓰레기더미가 놀이터이고, 다닥다닥 붙은 빈민가의 지붕 사이로 하늘 한 점 보이지 않는 그 곳이 자말과 형 '살림'의 고향이다. 어쩌다 그곳에 찾아온 유명 영화 배우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기꺼이 똥통에 빠지고,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종교 분쟁의 현장에서 어머니를 잃고, 그런 와중에 운명의 여인 '라띠카'를 만난 그 곳. 쓰레기더미에서 천 조각 하나로 하늘을 가리며 살던 중 앵벌이 일당에게 끌려갔다가 숟가락으로 눈을 뽑힐 뻔한(눈이 보이지 않는 앵벌이 소년에게 적선을 더 많이 한다는 이유로) 위기에서 벗어나고, 타지 마할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엉터리 가이드 노릇을 하고 관광객 신발을 훔쳐다 팔면서 생활하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앵벌이 일당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도 다시 뭄바이로 돌아올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바로 운명의 그 여인 라띠카 때문이다.
◆주인공이 만들어낸 운명
'자말 말릭은 퀴즈쇼에서 2천만루피의 상금이 걸려있는 최종 단계에 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영화는 첫 화면에서 이렇게 묻는다. 'A. 속임수로 B. 운이 좋아서 C. 천재라서 D. 결정된 운명이어서' 그리고 영화는 마지막에 답을 준다. 'D. 결정된 운명이어서'라고. 퀴즈쇼 마지막 단계에서 자말이 정답을 맞힐 지, 못할 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미 관객들은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결정된 운명이니까. 자말도 전날까지 1천만루피를 획득한 뒤 그만 둘 수도 있었지만 굳이 이튿날 다시 최종 상금에 도전하는 이유를 '운명'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자말을 움직이는 운명은 무엇일까? 동생이 사랑하는 여인 라띠카를 앵벌이 일당에게 남겨두고, 수년 뒤 어렵게 재회한 자리에서 그 여인을 겁탈하고, 자말을 만나기 위해 몰래 도망쳐 나온 여인을 강제로 붙잡아 가는 악역을 고스란히 맡았던 형 살림에게서 어쩌면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 인간적인 삶, 미래의 꿈이라고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인도 빈민층의 인생 속에서 살림은 어둠의 권력을 택했다. 어쩌면 자말이 맑은 영혼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살림이 모든 유혹을 스스로 떠맡았기 때문은 아닐까?
아카데미 10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8개 부문상을 싹쓸이 한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트레인스포팅', '28일 후'를 감독했던 대니 보일이 메가폰을 잡았고, 이 영화로 거의 모든 영화제의 감독상과 작품상을 석권했다. 다분히 인도적인 영화로 인도 외교관인 비카스 스와루프의 데뷔 소설 '질문과 대답'(Q and A)을 영화로 만들었다. 원작 소설도 전세계 36개 언어로 출간됐던 작품. 유명한 할리우드 스타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자말 역을 맡은 배우는 3명. 아역부터 소년, 청년까지. 그 중 마지막 청년 역을 맡은 데브 파텔의 눈빛은 긴 여운을 남긴다. 라띠카 역을 맡은 3명의 배우 중 마지막 프리다 핀토는 아름답다. 마지막으로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더욱 인상깊게 만든 것은 단연 음악이다. 아카데미에서도 음악상, 주제가상과 음향상까지 휩쓸었다. 영화 장면마다 스며나오는 인도풍의 경쾌한 운율에 절로 발을 끄덕이게 될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은 결코 놓치지 말 것. 유쾌한 웃음을 머금게 될테니.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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