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줄로 읽는 한 권] 기형도 전집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중략)"-대학시절- 중에서

'기형도 전집' 기형도 전집 편찬위원회 엮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355쪽/ 1만8천원

스물아홉, 젊은 봄날의 새벽녘에 서울의 한 심야극장에서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시인 기형도. 그 죽음의 장소는 온갖 추측을 낳았고 그 익명의 창작은 그를 아는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그의 선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의 시가 가진 치열함 때문이었을까? 이제 더 이상 무기력한 시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 없노라고 세상이 외면하던 1990년대, 사랑을 잃은 외로운 영혼들에게 소리 없이 다가온다. 마치 매서운 겨울을 이기고 따스한 봄이 오듯이…. 시인을 아는 이들은 그는 늘 웃고 있었으되 가슴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낭떠러지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 낭떠러지는 우리가 한번쯤은 번민했던 삶과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젊은 날, 불면의 밤을 떠올리며, 아니 실연의 아픔을 되새기며 지금은 추억이 되어버린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시인을 기억한다.

"저 새는 어제의 인연을 못 잊어 우는 거다/ 아니다, 새들은 새 만남을 위해 운다/ 우리 이렇게 살다가, 누구 하나 먼저 가면 잊자고/ 서둘러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아니다 아니다/ 중년 내외 두런두런 속말 주고받던 호숫가 외딴 오두막/ 조팝나무 흰 등 넌지시 조선문 창호지 밝히던 밤/ 잊는다 소쩍 못 잊는다 소소쩍 문풍지 떨던 밤."-소쩍새 울다 -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이민우 지음 / 창비 펴냄/ 96쪽/ 7천원

2001년 연봉 1천380만원짜리 계약직 보일러공의 시는 치열함 끝에 비장함이 묻어 있다. 그 치열함과 비장함은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의 인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면우 시인은 그의 시 '미인'에서 "한때는 선, 색, 몸집이 먼저 들어오더니 호숫가에 살며 만나는 이의 목소리, 미소가 깊이 와 닿는다."고 노래한다. 마흔이 넘어서야 여자 눈 속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다는 시인의 시에는 말없이 세상과 싸우며 참아왔던 그 세월이 녹아 있다.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시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노라고 소리쳤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는 얼마나 많은 인내와 사랑 속에서 나와야 하는지 차마 알지 못했다. 해서 참지 못하고 쉽게 세상에 묻어 버리고 말았다. 비에 젖은 일요일, 사라 본의 노래는 가슴을 저미고 시인들의 시어들은 마치 겨울을 이긴 새싹처럼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아! 그야말로 봄이다.

전태흥(여행작가·㈜미래티엔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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