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스파이 조직에서는 미녀 스파이를 '제비'라고 부른다. 제비처럼 미끈하게 세계무대를 날아다니며 활약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아름다운 웃음과 섹시함으로 상대의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중요한 정보를 빼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파이 역사에서 여성을 빼놓을 수는 없다. 격렬한 전쟁터, 로맨틱한 파티, 분위기 있는 카페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미녀 스파이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때로는 애틋한 사랑을 나누며, 때로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때로는 교활한 거짓말로, 때로는 기발한 지혜로 정보를 입수했다. 그녀들 중에는 반파시즘의 영웅도 있었고, 파렴치한 술집 마담도 있었고, 매력적인 댄서도 있었다. 이 책 '미녀 스파이 24인의 미스터리'는 20세기 가장 주목받았던 여성 스파이 24인에 관한 이야기다.
"여성의 도움 없이 비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요. 이 세상에 남자만 남았다면 모를까?" 2천년 전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줄리어스 시저에게 했던 말이다. 이 말은 20세기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20세기 역시 스파이의 시대였다. 제1차, 2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들은 스파이를 키워 정보를 입수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대륙을 흔들어놓은 '스파이의 여왕'은 마타하리였다. 유럽 최고의 댄서로 남성 갑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그녀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얼마 전 독일 정보국의 스파이가 됐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 어느 쪽의 스파이였는지는 지금도 논란이다. 독일의 돈을 받고 프랑스와 소련의 정보를 빼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가 프랑스를 위해 독일에 수많은 가짜 정보를 흘려 오히려 독일이 큰 피해를 보았다는 설도 있다.
1917년 10월 15일 그녀는 자신이 아끼는 댄스 슈즈를 신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차가운 총알을 받았다. 반역죄로 사형 집행대에 오른 것이다. 당시 마흔 한 살이었던 그녀는 태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사형 집행에는 병사 12명이 총을 쏘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 박힌 총알은 단 4발이었다. 8년 뒤 총살에 참여했던 한 병사는 일부러 그녀를 조준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몸은 죽은 후 의대생들의 맹장 수술 실습용으로 사용됐다.
프랑스의 '종달새' 마르트 리샤르는 이중 스파이 가운데 가장 영리한 요원이었다.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 스파이로 활약하며 프랑스를 위해 일했다. 스페인에서 활동중인 독일 스파이 명단을 확보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명단 확보에 실패하자, 마치 스파이 명단을 모두 확보한 것처럼 속여 스페인에서 활동중인 독일 스파이들이 모두 철수하도록 했다.
일본의 스파이 도조 에코는 영국에 침투, 영국군의 최신 잠수함 제조 정보를 입수해 자신의 몸 안에 숨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시체에 정보를 담아 일본에 전달하는 충격적인 작전에 참가한 것이다. 그녀가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은 카메라였다. 영국으로 침투되기 전 그녀는 복부절개 수술을 받고 그 속에 고정밀 초소형 카메라를 넣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맹장수술을 한 자국처럼 보였다. 특히 그녀는 급성 심근경색을 야기하는 약을 갖고 다녔다. 정보 수집이 끝나자 그녀는 약을 먹고 자살했다.
영국군은 그녀의 사인을 의심했다. 부검 결과는 그녀가 평소에 앓고 있는 심근경색이었다. 시체를 일본으로 돌려보내려던 영국 당국은 그녀의 맹장수술 흔적을 이상하게 여겼고, 결국 그녀의 주검 속에 든 비밀 정보를 알아냈다. 그러나 영국은 아무 것도 모른 척 시체를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그녀의 시신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일본 당국은 맹장수술 흔적에서 정보가 담긴 캡슐을 꺼내고 반색했다. 그러나 캡슐을 여는 순간 '쾅!'하고 폭발했다. 이 폭발로 캡슐 근처에 있었던 몇 사람이 숨졌다. 일본은 역사상 가장 잔인한 스파이 작전을 펼쳤고 영국은 이에 보복한 것이다.
소련의 KGB 할머니 멜리타 노우드는 40여년 동안 영국의 각종 기밀을 소련에 넘겼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할머니였다. 40여년 동안 누구도 그녀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뛰어난 스파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추어 스파이였던 인도 공주 누르 이나야트 칸은 뛰어난 외국어 실력과 귀족적인 분위기가 스파이에 딱 어울렸지만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거친 성격에 세상 물정도 몰랐다. 그녀에게는 모든 일이 건성이었고 스파이 임무조차 재미있는 게임에 불과했다. 그녀는 독일 점령하의 파리에 잠입해 무선전신 요원으로 일했다. 하지만 방음도 안 되는 방에서 매일 밤 11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전보를 쳤고 결국 '시끄럽다'는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그러나 이 순진한 아가씨는 인도 공주로 귀하게 자라난 사람답게 대단한 용기와 자존심으로 모진 고문을 견뎌냈다. 그녀는 고문으로 죽을 때까지 비밀을 발설하지 않았다.
일본의 양대 여성 스파이 '가와시마 요시코'와 '미나미죠 구모코'는 중국에서 수많은 작전에 참가했다. 당대 최고 미인이라는 말까지 들었던 가와시마 요시코는 남장미인, 방탕한 여인, 만주의 마녀로 통했지만 1945년 체포돼 1948년 총살됐다. 장제스 암살을 두 번 시도했고 국민당 고관을 매수했던 미나미죠 구모코는 상하이 번화가에서 타살됐다.
이 외에도 책에는 전설적인 스파이 학교 교장 '엘스베트 슈라그뮐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연방수사국이 '남자 만 명보다 무서운 여자'라고 평가했던 히틀러의 스파이 '스테파니', 노르웨이의 총리 부인으로 KGB의 스파이였다는 사실조차 드러나지 않았던 '피오나' 등 많은 여성 스파이를 다루고 있다. 312쪽, 1만1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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