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시사유머] 初夜有情(초야유정)

'첫날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미당(未堂)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의 맨 첫머리에 나오는 '신부'라는 이 산문시는 차라리 한편의 단편소설같다. 첫날밤에 묻어버린 아리따운 한 여인의 애틋한 일생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첫날밤'이란 말처럼 우리 고유의 낭만과 토속적인 정서를 시사하는 것이 또 있을까.

어느 문인의 예닐곱살 적 일이라고 한다. 집안의 글줄이나 하는 누구에겐가 들은 문구가 왠지 마음에 들어 안방 문지방이 닳도록 넘나들면서 장단 맞춰 중얼거렸다. '靑袍帶下紫腎怒(청포대하자신노) 紅裳跨中白蛤笑(홍상과중백합소)!

그런데 삼촌과 고모가 그 말을 듣고 자꾸만 웃기에 신이 나서 더 크게 읊조리다가 엄마에게 꿀밤을 얻어맞고는 했다. 그때는 어머니가 왜 타박을 했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성인이 되고 나서야 그 뜻을 알고는 혼자 웃곤 했다는 것이다.

가난한 양반집 총각이 부잣집 딸과 혼인을 하고 첫날밤을 맞았는데, 신랑은 신부의 다홍치마에 '靑袍帶下紫腎怒'란 문구를 슬그머니 적었다. 비록 부잣집이기는 하지만 양반집 규수가 아니었던 신부의 기를 일찌감치 꺾어 놓을 요량이었다. 그 뜻은 '푸른 예복 관대 밑에 붉은 거시기가 잔뜩 화났소'란 외설적인 내용이었다.

설마 그 뜻을 알까 싶었는데 신부의 대구(對句)가 실로 만만찮았다. 신부의 응답인 즉, '紅裳跨中白蛤笑'였는데, '다홍치마 고쟁이 속의 하얀 조갑지가 방긋 웃소'라는 뜻이었다. 글깨나 읽은 양반집 자제라 하여 으스대던 신랑의 글보다 한수 위였다. 훨씬 은유적이고 문학적인 표현으로 화답했으니, 양반 행세로 기선을 잡으려던 신랑의 풀이 되레 꺾이고 말았을 것이다.

자고로 여인을 깔보고 대수롭지 않게 대하려다 낭패를 본 남성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일생을 유랑하던 천재시인 김삿갓도 그 예외가 아니었다. 김삿갓이 함경도 단천 고을에서 팔자에 없는 장가를 들었던 첫날밤의 일이었다.

사립문 밖 달빛은 교교한데 촛불이 꺼진 신방의 원앙금침 위에는 천금 같은 시간이 내려 쌓였다. 그런데 운우지정(雲雨之情)에 취해 있던 김삿갓이 슬그머니 일어나 불을 켜더니 벼루에 먹을 갈아 쓴 글귀가 '毛深內闊 必過他人'(모심내활 필과타인)이었다.

'숲이 깊고 샘이 넓으니 분명히 다른 사람이 지나갔다"니…. 비록 장난기가 섞였다 하더라도 초야(初夜)를 치른 신부에게 던지는 메시지 치고는 정말 지독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불로 몸을 감싼 채 고운 이마를 살포시 찌푸리고 있던 신부가 섬섬옥수로 붓을 잡고 또박또박 반론을 펼쳤다.

'溪邊楊柳不雨長'(계변양유불우장)이요 '後園黃栗不蜂柝'(후원황률불봉탁)이라. '시냇가의 버드나무는 비가 오지 않아도 잘 자라고, 뒤뜰의 누런 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더라'라는 항변이었으니, 사실 처녀가 아니었다고 한들 그 여인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았으랴.

옛 여인들은 정절(貞節)을 생명처럼 여겼다. 여인의 절개에는 그만한 아픔과 슬픔과 형언할 수 없는 한(恨)이 수반되는 법. 혼전관계를 예사로 여기고 남녀간의 애정을 장난이나 놀이쯤으로 치부하는 요즘 세태에서야 그까짓 정조 관념이 무슨 대수일까만, 세상에 고난 없이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어디 있던가. 小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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