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나무 사이사이로 숲은 태어나고 또 태어나 늘 새롭다. 나무와 숲과 인간은 늘 새로운 관계로 공생한다. 나무는 잎 사이로 빛을 품기도, 가리기도 한다. 빛을 받아 양지를, 빛을 막아 그늘을 만든다.
나무는 나무로, 숲으로 인간을 사랑한다. 달콤한 산소와 향으로, 푸르름으로 사랑을 뿜어낸다. 나무와 숲은 자연을 일구고, 자연은 사랑을 베푼다.
대구시 남구 대명동 가침박달나무숲,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 느티나무숲, 달성군 옥포면 교항리 이팝나무숲, 경주 계림이 그렇다. 사랑을 나누는 나무가 있고, 인물과 역사를 품은 나무가 있다. 죽어서 더 빛난 나무도 있다.
신록의 계절을 맞아 '나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고목의 나이는 하느님과 나무 자신만 안다?
나무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김영사 펴냄, 2004년)를 쓴 박상진 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는 ▷나이테 ▷생장추(生長錐) ▷굵기 ▷문헌이나 전설 등을 활용한 방법을 들었다. 나무를 베어내고 나이테 개수에다 그루터기까지 자란 햇수 3~5년을 더하면 정확한 나이를 알 수 있다는 것. 문제는 나무를 베지 않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는 점이다. 드릴처럼 생긴 생장추를 이용해 나무줄기에다 작은 구멍을 내 젓가락 굵기의 알갱이를 뽑아서 나이테 수를 새는 방식도 있다. 그러나 이 방법도 너무 단단한 나무나, 속이 썩은 고목에는 무용지물이다. 동심원으로 자라는 나무의 반지름과 나이테의 평균 너비 등을 감안한 '굵기 측정' 방식도 있지만, 나무 종류와 환경조건 등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정확도가 떨어진다. 결국 수 백 년 이상 된 고목의 경우 문헌 등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한 그 나이는 전해지는 이야기로 추정할 수 있을 뿐인 셈이다.
나이 측정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는 미국 캘리포니아 화이트마운틴에 있는 '브리슬콘 소나무'가 꼽히고 있다. 1964년 연구목적으로 한 나무를 베었는데, 확인된 나이테 숫자만 4천844개였다는 것. 안쪽이 썩어서 확인이 어려운 나이테까지 감안하면 최소 5천년을 넘게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강원도 정선 두위봉의 1천400년 된 주목, 비공식적으로는 울릉군 도동의 향나무가 수령 2천년이 넘어 가장 오래된 나무로 꼽히고 있다. 강원도 주목의 경우 산림과학원이 수령을 조사했고 문화재청이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지만, 울릉도 향나무 수령의 경우 추정한 것이다.
상주 외남면 소은리와 흔평리에는 300년 이상된 감나무 3그루 등이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통상 100년을 넘기지 못하는 과실수의 특성상 300년은 엄청난 나이다. 예천 감천면 천향1리 수령 600년 된 석송령 소나무는 해마다 재산세 3~4만원을 내는 '세금내는 나무'이고, 봉화 춘양면 우구치~욱돌봉 사이 능선에 자라는 철쭉은 수령이 약 550년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철쭉으로 꼽힌다. 대구 수성구 범어동 범어네거리 은행나무, 영주 부석면 북지리 골담초, 경주 내남면 부지리 느티나무, 영주 순흥면 내죽리 은행나무, 경주 외동 석계리 팽나무 등은 모두 1천년이 넘는 '큰 어르신'들이다.
◆지역의 나무와 인물
대구 동구 지묘동 신숭겸장군 유적지에는 각각 수령 400년이 된 팽나무 한 그루와 배롱나무 다섯그루가 유적지를 지키고 있다. 신숭겸 장군은 927년 신라를 침공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전했다 공산전투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자 자신이 왕건으로 가장해 싸우다 숨졌다. 배롱나무는 표충단 주위를 둘러싸고, 팽나무는 유적지 외곽에서 신숭겸 장군을 수 백년 지키고 있다.
파계사 느티나무(250년)는 조선 21대 왕 영조와 인연이 깊다. 아들이 없던 숙종이 대궐로 승려가 들어오는 꿈을 꿨는데, 신하를 시켜 숭례문 밖을 살피게 하니 정말 승려가 있었는데 그가 파계사의 영원선사였다는 것. 숙종이 그 선사에게 왕자 탄생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고, 이듬해 왕자가 탄생했는데 바로 영조였다. 파계사는 영조의 탄생설화를 간직하고, 실제 중요민속자료 220호인 영조의 도포도 보관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영조의 생전(1724~1776년)에 태어난 나무다.
◆역사와 전설이 담긴 나무
대구 북구 연경동 수령 1천년 된 느티나무는 이 지역 법정동인 '연경동'과 행정동인 '무태조야동'의 이름과 관련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 싸우기 위해 이 곳을 지나다 글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 조심스럽게 지났다고 해 '연경(硏經)'으로 불렀다는 설이 있다. 왕건이 견훤에게 패해 도주하면서 부하들에게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고 빨리가자고 독촉했다고 '무태(無怠)'라는 설도 있다. 또 왕건과 신숭겸장군이 밤길을 가면서 아낙네가 부지런히 길쌈을 하고 있어 이를 칭찬해 게으름이 없다고 한데서 '무태'가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구 동구 부동의 느티나무(수령 210년)에는 꼭대기에 까치집이 2개 있는데, 까치들이 저녁에 수다스럽게 울면 귀한 손님이 오고, 부엉이가 슬피 울면 새벽에 초상이 난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동네사람들은 해마다 정월대보름에 동제를 지내며 나무를 신성시 여긴다.
◆죽어서 더 빛난 나무
참나무는 죽어서 좋은 숯으로 살아난다. 화력이 좋은 숯으로 비견할 나무가 없다. 신라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6년 경주 경마장 터를 발굴했을 때 신라 중기 숯가마가 발견됐는데, 분석해보니 참나무로 만든 숯이었다. 그러나 무당이 귀신을 쫓는 데는 뽕나무 숯을, 다리미질할 때는 온도를 빨리 올릴 수 있는 소나무 숯을 주로 썼다.
소나무는 예부터 배의 주 재료로 많이 사용됐다. 가공하기 쉽고, 물속에 오래 버티기 때문이다. 1975년 경주 안압지 발굴에서 나온 작은 나무배와 노도 소나무였다. 소나무외에 상수리나무, 비자나무, 느티나무, 졸참나무, 굴피나무, 녹나무 등도 우리나라 배의 재료로 사용됐다.
합천 해인사의 산벚나무는 팔만대장경판(고려대장경판)의 일부로 다시 태어나 770년 이상을 장수하는 복 받은 나무다. 팔만대장경의 경판에는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가장 큰 은혜를 입었고, 박달나무, 거제수나무, 단풍나무, 후박나무 등도 자신의 몸을 조금씩 보탰다.
◆나무를 사랑한 나무
나무는 인간에게 사랑과 향을 뿜어내지만, 나무끼리도 사랑을 나눈다. 서로 손을 잡거나 몸을 끌어안거나 심지어 자신의 몸속에 다른 나무를 품기도 한다.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 운문호 옆 산 속에는 나란히 선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 손을 꼭 붙잡고 있다. 이들은 약 50년간 이렇게 사랑을 속삭이며 커왔다. 연리지 소나무다.
의성군 구천면 청산리에는 모과나무가 말채나무를 '말 그대로' 품고 있다. 늙은 모과나무의 죽은 세포에 균이 들어가 가운데 줄기가 텅 빈 공간이 됐고, 여기에 말채나무의 씨앗이 흘러 들어간 것. 모과나무가 어머니처럼 말채나무를 품에 안아 키우고 있다.
충남 금산군 금산읍 양지리 장동마을의 팽나무 부부는 서로 꼭 끌어안고서 오랜 입맞춤을 하고 있다. 이 연리목 팽나무에는 150여년 전 아내 사랑이 남달랐던 남편이 아내가 숨진 뒤 이 곳에 팽나무 한 그루를 심었는데, 다음날 두 그루가 되었다는 전설이 담겨 있다.
◆헷갈리는 나무 이름
소나무가 가장 헷갈린다. 품종도 다양하고, 비슷한 이름의 다른 나무도 많다. 옛 이름은 송(松) 또는 송목(松木), 일본식 이름은 적송(赤松)이다. 내륙지방에서 많이 자란다고 육송이라고도 했다.
반송(盤松)과 강송(剛松,금강소나무·춘양목)은 소나무의 한 품종. 일반 소나무는 땅에서부터 줄기가 하나만 올라오지만, 반송은 줄기가 여러 갈래로 올라온다. 금강산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울진과 영덕까지 내려오는 질 좋은 춘양목은 영동선 춘양역을 통해 많이 반출됐기 때문에 붙여진 비공식 이름이다.
해송(海松,곰솔), 금송(金松), 잣나무, 미송(美松) 등은 소나무와 다른 나무다. 해송은 바닷가 소나무와 별개의 나무로, 나무껍질이 검어서 흑송 또는 검솔로 불리다 곰솔로 됐다. 금송도 '낙우송과(科) 금송속(屬)'에 속한 것으로, 소나무와 별개의 나무다.
잣나무는 소나무보다 속살이 더 붉어 홍송, 잎이 다섯 개씩이어서 오엽송으로도 불린다. 신라 때는 당나라에 잣을 수출해 신라송이 됐고, 중국인들은 바다 건너왔다고 해 해송이라고도 부른다. 미송은 '소나무과 미송속'에 속한 미국의 대표적 바늘잎나무. 미국 소나무는 남부에 따로 있다.
참나무는 6종을 통칭해 부르는 이름이다.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가 모두 참나무다. 중국에서 들어온 회화나무와 우리나라 자생인 느티나무는 생김새가 딴판인데, 옛 문헌에서는 둘 다 괴(槐), 괴목(槐木)으로 불렀다. 참 헷갈린다.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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