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케이트 윈즐릿의 연기 일품…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사람은 저마다의 비밀을 품고 산다. 학창 시절 시험 시간에 곁눈질을 했거나 문방구에서 볼펜 한 자루 훔쳐본 비밀을 말하는 게 아니다. 비밀은 자신이 받은 상처일 수도, 남에게 준 상처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일 수도 있다. 당신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적이 있는가? 그것은 혼자만의 사랑이었나, 둘이 공유한 비밀스런 사랑이었나? 그 사랑을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왜 털어놓았나? 더 이상 비밀스러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인가? 그래서 홀가분한가?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다.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사랑, 유태인 학살과 나치 전범 재판, 그리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사랑과 이별을 이야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따로 떼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실로 꿰어져 있고, 그 실은 바로 '비밀의 끈'이다. 어느 한여름 뜨겁게 사랑한 뒤 30년간 지켜온 두 남녀의 '비밀의 끈'을 풀어보자.

◆한여름의 뜨겁던 사랑, 그리고 이별

1958년 서독의 노이슈타트. 전차를 타고 학교에서 돌아오던 한 소년은 구역질을 참지 못해 전차에서 내리고, 어느 건물 입구에서 구토를 한다. 한겨울 차갑게 내리는 빗속에도 볼이 발갛게 상기될 정도로 열이 심하다.

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여인이 양동이에 물을 담아와서 구토물을 쓸어낸 뒤 소년을 안아주며 "괜찮다"고 말한다. 성홍열 때문에 몇달간 누워 있던 소년은 감사의 표시를 하기 위해 꽃다발을 들고 다시 그 건물로 찾아가고, 여인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워 달아나고 만다.

며칠 뒤 다시 찾아온 소년에게 여인은 대뜸 아래층에 있는 석탄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석탄 때문에 얼굴이 시커멓게 변한 소년의 목욕물을 받아준 뒤 여인은 발가벗은 몸으로 타월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시작된다. 아니 그들의 육체 관계는 시작된다. 그리고 책 읽어주기도 시작된다. 학교에서 배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읊어대는 소년에게 보내는 여인의 눈길은 사랑 이상이다. 책을 읽어보겠냐고 권하자 여인은 "읽은 것보다 읽어주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목욕물 속에 발가벗은 채 마주 앉은 소년에게 "참 잘한다"고 칭찬하자 소년은 "무엇을?"(섹스를 잘하는 것이냐는 기대감을 안은 채)이라며 되묻고, 여인은 "책 읽기 말야"라고 핀잔을 준다. 세 번을 만난 뒤에야 그들은 이름을 나눠 가진다. 소년은 '마이클 버그', 여인은 '한나 슈미츠'.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어주며 은밀한 관계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자 한나는 "더럽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만 읽을지 머뭇거리는 마이클에게 "계속해"라고 재촉한다. 규칙도 정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허겁지겁 옷부터 벗었지만 이제는 책을 읽고 섹스를 나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깊어간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여인이 사라진다.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소년의 말이 무색하게 흔적조차 지워져버린 한나. 상처는 시간 속에 묻히고, 시간은 기억조차 지워 나간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8년 뒤 어엿한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어느 날 나치 전범 재판에 참석하게 되고, 재판정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이름 '한나 슈미츠'를 듣고 고개를 든다. 일자리를 찾아 아우슈비츠에서 일했던 한나는 나치 전범으로 재판정에 나왔다. 매달 10명씩 가스실로 보낼 사람을 뽑았냐는 판사의 물음에 다른 5명의 피고인들이 전부 부인했음에도 한나는 "그랬다"고 답한다. 이유를 묻는 판사에게 한나는 또박또박 답한다. "매일 사람들이 새로 들어오는데 자리는 부족하고….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겠어요?" 죽어갈 사람을 당신이 직접 뽑았냐는 물음에 이런 답을 듣자 판사는 그만 말을 잃고 만다.

모르고 저지르는 죄도 죗값을 물어야 할까? 결국 한나는 불이 난 교회에 유태인 300명을 가둬 둔 죄목으로, 그래 놓고도 허위 보고서를 작성한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게 되는데…. 과연 한나는 보고서를 썼을까? 재판 과정을 보고서야 평생 한나가 숨겨 온 비밀을 알게 된 마이클. 한나는 8년 전 왜 갑자기 떠나야 했던 것일까?

◆케이트 윈즐릿의 감동적 연기가 일품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빌리 엘리어트' '디 아워스'의 스티븐 달드리가 감독을, '타이타닉'의 히로인 케이트 윈즐릿이 '한나 슈미츠'역을,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주인공 랄프 파인즈가 '마이클 버그' 역을 맡았다.

아카데미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9개 부문을 휩쓸었던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랄프 파인즈는 이번 작품에서도 대사가 필요 없는 절제된 눈빛 연기를 보여주었다. 물론 마이클 역을 주로 소화한 배우는 소년과 청년 시절을 연기한 데이빗 크로스. 어린 나이에 감독 눈에 띄어 베드신을 연기할 수 있는 나이까지 3년을 기다렸다는 배우답게 여린 감수성을 지닌 15세 소년부터 진실과 비밀 사이에 갈등하는 법대생까지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단연 케이트 윈즐릿에게 돌아간다. 15세 소년과의 이루어질 수 없지만 간절한 사랑을 나누는 여인부터, 떳떳할 것도 없지만 고개 숙여 잘못했다고 고백할 수도 없는 전범 피고인까지. 영화 속에서 한나는 단 한번도 '마이클'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꼬마야"(Kid)라고 부른다. 20여년간의 수감 생활을 끝내고 가석방을 앞둔 시점에 면회를 온 중년의 마이클을 보면서도 그녀는 "꼬마가 어른이 됐네"라고 말한다.

영화는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다. 다 알려주고 보여주는 듯하지만 많은 궁금증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무엇이 궁금한지를 언급하려면 영화 줄거리를 다 들려줘야 할 판이니 그럴 수도 없다.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허점인 듯도 하다. 원작 소설은 전세계 40개국에서 출간된 베스트셀러. 하지만 영화도 2009년 아카데미 5개 부문 후보에 오를 만큼 인정받은 작품이니 감히 어설프다 말할 수는 없을 터.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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