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문학이 '가족서사'로 회귀하고 있다. 한국 출판인협회 집계 5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60만부를 판매한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비롯해 공지영의 '즐거운 나의 집'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서하진의 '착한 가족', 하성란의 '알파의 시간' 등이 그것이다.
가족 소설의 잇따른 출간에 대해 문학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여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수십 년 동안 해체하려고 노력해온 '가족 이데올로기'가 되살아나 한국문학의 시계추를 과거로 되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집'이라는 울타리를 힘겹게 뛰쳐나온 한국문학이 '황야'로 나아가 뚜벅뚜벅 걷기를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문학에서 종종 '집' 혹은 '아버지'는 가부장적 권위, 억압, 구습을 상징한다.) 몇몇 평론가들은 문학의 이 같은 귀가를 '돌아온 탕자'에 비유하기도 한다. 가족이 여전히 신화로 살아 있으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버지의 집'이 '어머니의 집'이 됐을 뿐이라는 것이다.
가족소설의 퇴행을 우려하는 평론가들은 '가족 서사가 갈등을 (임시로) 봉합하고 고통을 당연히 견뎌야 하는 무엇'으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가족 간의 원초적 소통, 사랑, 이해를 내세워 고통과 책임을 미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학은 '공감이나 감동'을 넘어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소설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소설의 전개방식에 퇴행적인 면모가 분명히 있다. 그래서 평론가들의 주장은 일리 있다. 그러나 대중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결국 사람살이가 아닌가?
평범한 우리는 위대한 작곡가도, 위대한 발명가도 아니다.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야스나리가 아닌 우리는 '영웅 교향곡'이나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할 수 없고, '설국'을 쓸 수도 없다. 우리가 지키고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가족'일 것이다. '천재'가 아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결국 자식을 낳아 반듯하게 기르고, 부모를 공경하는 삶이다.
우리가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피로한 몸뚱이를 눕히지 않고 일하는 것은 '영웅'을 작곡하거나 '설국'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기 위해 산다.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며, 자란 후에는 부모의 사랑에 감사하고, 제 자식을 따뜻하게 보살피며 늙고 죽는다.
그 삶은 평범해서 주목받지 못한다. 게다가 힘겹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마다 세상이 엄청나게 자라 있고, 밤에 돌아와 대문 앞에 서면 집이 거인이 돼 있다. 그래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세상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힘에 부친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 삶이 흔해 빠지고 남루해서 '가치 없는 삶'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야박하다. 언제나 흔해 빠진 것들이 소중한 법이다.
문학이 공감이나 감동을 넘어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평론가들의 말은 문학적으로 가치 있다. 그러나 '자극'을 위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문학적으로 살해'하는 글쓰기는 더 이상 신선하지 않다. 그런 식의 '자극'은 굉장히 신선해 보이지만 손쉬운 영합일 뿐이다. 한국문학은 이미 철저하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해했고 지금 문제는 우리에게 부모가 없다는 점이다.
조두진 문화체육부 차장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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