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종욱의 달구벌 이야기](12) 팔공산 자락의 동화사

왕건을 위태롭게 한 한송이 꽃

동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의 본산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대가람이었으며, 금산사'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신라 소지왕 15년(서기 493년)에 극달화상이 창건,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흥덕왕 7년(서기 832년)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서 동화사(桐華寺)라 고쳐 불렀다고 전한다. 그러나 창건 연대를 그대로 믿기 어려워 심지왕사 때의 중창을 창건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동화사는 역사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한동안 후백제와 긴장 관계에 있었다. 결국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돼 큰 충돌이 일어났다. 서기 927년 9월 견훤은 고울부(高鬱府'지금의 영천)를 습격한 뒤 서라벌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왕건은 신라로 사신을 보내 조문하는 동시에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후백제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첫 싸움은 동쪽 기슭 은해사 입구에서 벌어졌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후퇴한 왕건은 신숭겸이 이끄는 증원군과 합세하여 팔공산 남쪽 동수 입구, 지금의 지묘동 일대에서 다시 한번 접전을 벌였으나 결과는 전멸에 가까운 참패였다. 왕건은 신숭겸을 비롯한 장수들의 분전으로 겨우 목숨을 구해 달아났다. 이것이 후삼국 통일전쟁의 3대 전투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동수대전(桐藪大戰)의 전말이다.

동수대전의 승패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이 창건이래 줄곧 동수(桐藪) 또는 동사(桐寺)로 불리던 동화사이다. 그 무렵 동화사는 견훤의 세력과 깊이 밀착되어 있던 진표율종(眞表律宗), 즉 백제계 법상종 사찰로 견훤을 지원하던 신라영토 안의 근거 세력이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사찰 전체가 불타고 말았다. 광해군 1년(서기 1608년) 중건할 때 화주(化主)인 학인(學仁)이 미륵전을 재건했으며, 영조 1년(서기 1725년) 다시 중창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한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대웅전은 자태가 빼어나고 화려하다. 건물도 건물이려니와 앉은 자리와 모습이 절집의 맛을 살려준다. 뒷산 줄기가 뻗어 내리다 끝나는 자리에 우뚝 솟아 마치 그 끝에 피어난 꽃송이처럼 지붕 너머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아무튼 큰 절의 법당으로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집채가 훤칠하게 돋보여 팔공산을 대표하는 동화사의 법당으로 손색이 없다.

대웅전 왼쪽으로 200년 된 오동나무가 우뚝 서 있다. 심지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뜻을 기리기 위해 '심지대사 나무'라 이름지었다. 그 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금당암 3층석탑(보물 제248호)'비로암 3층석탑(보물 제247호)'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석조부도가 있다. 그리고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1992년에 조성된 통일약사여래대불이 있다. 그 크기가 아파트 12층 높이와 맞먹는다.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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