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는 인류에게 발전과 재앙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겨준 시기로 기록될 듯하다. 21세기 초입을 사는 우리들은 이미 20세기가 만든 풍요를 누리면서도 슬금슬금 다가오는 갖가지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특히 발전의 첨병으로 꼽히던 것들이 재앙의 원인으로 뒤바뀌는 충격이 잦아지면서 가치체계에 혼란이 생기고 있다.
石綿(석면)이 그 중 하나다. '발전의 총아'에서 '침묵의 살인자'로 급전직하했다. 산업현장에서부터 가정용 소비재에 이르기까지 3천 개가 넘는 제품에 들어가는 마법의 물질이었으나 지금은 폐암과 악성중피종을 일으키는 1급 발암물질로 취급된다.
석면 노출로 해마다 전 세계에서 10만 명의 노동자가 숨지는 것으로 추산되고 국내에서도 최근 건설, 조선, 석면방직 등의 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석면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3년 석면방직업체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가 악성중피종에 걸려 산업재해 인정을 받았지만 올해 들어서야 석면을 산업용으로 쓰거나 수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전국 사업장 건물의 절반이 석면을 함유하고 있어 철거나 해체 때 인근 주민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그런데도 산업용 외에는 언제 규제가 이뤄질지 여전히 방치 상태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시중에서 유통되는 베이비파우더와 어린이용 파우더 30개 품목을 검사한 결과 원료 1건과 제품 11건에서 석면이 검출됐다고 1일 발표했다. 충격적인 일이지만 자체적인 위기 관리 노력의 결과물로 보이지 않는 점이 더 씁쓸하다. 이날 방영되는 한 방송사의 고발 프로그램에 맞춰 발표한 흔적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한승수 국무총리가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최근 석면 피해 조사에 대한 언론보도만 있고 정부의 대응 노력이 알려지지 않아 국민이 불안해한다"고 나무란 지 며칠도 안 된 일이다.
경제난과 생활고를 덜어주는 건 고사하고 국민의 생명조차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에 할 말이 없다. 담배와 함께 미국 내 대표적인 환경 소송으로 사상 최대의 보상액수를 기록하고 있는 석면 소송이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나올 것 같다. 해당 기업은 물론 정부도 당연히 피고다.
김재경 사회1부 차장 kjk@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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