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연쇄 살인사건,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그림자 살인'

영화 '그림자 살인'은 흥행할 만한 요소는 두루 다 갖추었다. 좋은 배우와 탄탄한 시나리오, 적당한 카메라 흔들림을 통한 극적 긴장감 고조와 장면마다 적절한 음악 배치, 지루할 만하면 한 번씩 던져주는 코믹 요소와 나름대로 비장미를 갖춘 결말까지. 요리로 치면 갖출 것을 다 갖춘 일품요리급이다. 초보 요리사(감독)지만 재료가 너무 익어버리거나 설익게 만들지도 않았고, 나름 적절한 조미료와 향내까지 가미한데다 마지막에 접시에 담아내며 멋을 부릴 줄도 알았다. '그림자 살인'의 장르는 명확히 정의하기 어렵다. 추리극을 줄기로 하면서 역사와 코미디를 덧입혔고, 핏빛과 화약 내음 묻어나는 누아르적 요소도 보인다. 관객 반응도 극과 극을 달린다.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

영화는 구한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할 뿐 구체적인 연도 배경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일제 통감부(統監府)가 나오고, 마지막에 '화란국(네덜란드) 헤이그'가 언급되는 점으로 미뤄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을 넘어서 고종 황제가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1907년으로 치닫는 시점쯤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영화에서 시간 배경은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구한말이라는 시대를 편의상 빌려온 듯 여겨진다. 현재 시점이라면 '정말 저런 일이 가능했을까?'라며 의구심을 던질 만한 사건의 성격, 인간 군상들의 부조리한 모습들에 대해 '저런 시대라면 그랬을 지도 몰라'라는 자의적 해석에 내맡길 수 있는 편리함을 백분 활용했다. 워낙 혼란스럽고 눈이 팽팽 돌 만큼 변화의 속도도 빠르며, 중심이 무너지고 질서가 붕괴된 채 서로 기회를 잡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상황. 조선의 구질서는 무시당하는 동시에 일제를 앞세운 신문명은 자리매김을 못한 시기. 그래, 그렇다면 별의별 일이 다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영화는 이런 의문을 던진다. '과연 저런 일들이 저 때 뿐이었을까?' 권력을 악용해 추악한 비리를 저지르는 고위층과 돈을 좇아 그들의 더러운 요구에 충실히 따르는 집단, 그리고 이들을 연결시키는 거간꾼 노릇을 하는 해바라기형 중간 권력층까지. 한 여배우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온갖 의혹들이 난무하는 현 시점에서 이번 영화는(물론 전혀 그런 의도가 있을 수도, 있지도 않지만) 시사하는 바가 적잖아 보인다. 공중 그네를 타기 위해 올라선 망루에서 기어이 바닥을 향해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던 한 소녀의 절박함과 공포를 지켜 보면서 한 여배우가 죽음으로 호소하고자 했던 현실의 부조리가 오버랩되는 것은 기자만의 별스러운 감정이었을까?

◆고위층을 둘러싼 더러운 비리

온통 피로 물든 한적한 뒷뜰의 방안. 방 주인 '민수현'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내무 대신인 아버지는 아들을 찾기 위해 고액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출세에 눈이 먼 종로서 순사부장인 오영달(오달수)은 민수현을 찾는데 혈안이 된다. 한편 젊은 의학도 광수(류덕환)는 해부 실습을 위해 우연히 주워온 시체가 민수현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살인 누명을 쓸 위기에 처한 그는 바람난 부인들의 뒤꽁무니를 쫓아 돈을 뜯는 소위 '사설 탐정' 진호(황정민)를 찾아가 사건을 의뢰하고, 500원이라는 당시로선 거액의 현상금에 혹한 진호는 뛰어난 의학 지식을 가진 광수를 조수 삼아 사건을 맡기로 한다. 살해된 민수현의 방에서 발견된 것은 백색 가루 '모루히네'(모르핀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와 기묘한 형상의 일본 인형. 진호와 광수는 양가집 규수라는 신분을 감춘 채 여류 발명가로 활동하고 있는 순덕(엄지원)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그러던 중 두 번째 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피해자는 다름 아닌 당시 최고 권력을 자랑하던 경무국장. 더군다나 민수현의 시체가 버려진 곳과 같은 곳에서 수차례 칼에 찔려 옷이 벗겨진 채 발견된다. 연속된 살인으로 수사에 심한 압력을 받은 영달은 가짜 범인을 만들어 수사를 끝내려 하고, 사건의 실마리를 찾은 진호와 광수는 진범을 찾아 나선다. 그런 와중에 마약과 아동 성매매(엄밀히 말하면 고위층에 대한 성 상납)이라는 사건의 더러운 내막이 서서히 밝혀진다. 막바지에 이르러 당연히 범인일 것으로 여겨졌던 피의자를 둘러싼 뜻밖의 비밀이 드러나면서 영화 제목이 왜 굳이 '그림자 살인'인지도 차츰 분명해지는데.

◆관객들의 반응은 극과 극

주연급 배우들의 연기는 관록에 비해 다소 부족한 느낌. 물론 영화가 진행되면서 차츰 빠져들게 되지만 감정의 흐름보다는 스토리를 따라가기 급급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지나친 의욕의 한계다. "사람이 많으면 바람 피우는 여자도 많을 것"이라며 미국행을 꿈 꾸던 주인공이 갑작스레 꿈을 접고, "그저 이렇게 사는 것만도 모험"이라던 순덕이 엉뚱하게 신여성으로 차려입고 미국행 배에 오르는 게 된 계기를 납득하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폭소를 자아내는 것도 아니고, 눈물 샘을 자극하는 것도 아니며, 비장한 시대적 부조리를 지켜보며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 요소들이 버무려져서 어느 하나 두드러지지 않았다고 칭찬할 수도 있지만 바꿔 말하면 별다른 특색없는 영화가 됐다고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관객들의 반응이 극과 극을 치닫는 이유는 이 때문이리라. 아울러 초반 도입부에 들려오는 배우들의 대사는 몰입을 방해한다. 구한말 경성 말투를 흉내내는 수준에서 풍겨오는 이질감을 떨쳐버리는데 상당한 시간이 든다. 하지만 일단 영화는 관객들의 기대에 그럭저럭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제7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된 작품답게 스토리 전개도 탄탄하다. 조연급이지만 오달수가 보여주는 순사부장 연기도 일품이다. 배역의 성격으로 볼 때 오달수는 일단 얼굴만으로도 80점 따고 들어갔다. 게다가 야비와 오만, 비겁을 넘나들며 보여주는 표정 연기도 볼 만하다. 군관학교 시절 오영달보다 계급이 높았던 진호는 왜 관직을 떠났을까? 미국으로 떠난 순덕은 언제 돌아올까? 이들 둘 사이의 로맨스를 얼핏 짐작케 했던 순덕의 말은 무엇을 뜻했나? 마치 속편을 예고하는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 하다. '그림자 살인 2'는 나올 수 있을까?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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