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프랑스 사실문학의 거장 발자크가 저널리즘과 관계를 맺은 것은 그가 20대 때인 1824년 무렵이다. 그가 활동무대를 문학에서 신문으로 옮긴 이유는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평균 책값은 7프랑에서 10프랑 정도로 매우 비쌌다. 노동자가 하루 12시간씩 사흘 이상 일해야 책 한 권을 겨우 살 수 있었다. 당시 출판업에 손을 댔다가 거액의 빚을 진 발자크의 입장에서 '책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830, 40년대 중반 발자크는 문학과 언론의 경계를 넘나들기를 반복했다. 발자크가 저널리즘에서 찾았던 '돈과 권력과 명예'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저널리즘이 돈벌이와 연결됐을까. 발자크가 19세기 프랑스 신문의 이면을 파헤치고 풍자한 저서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에서는 적어도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신문과 정치, 인간 군상에 대한 성찰이 더 큰 수확은 아니었을까 싶다.
150여 년 전 발자크가 고민하던 신문과 지금 신문은 규모만 다를 뿐이지 쌍둥이처럼 빼닮았다. 현재 전 세계에서 6천600여 종의 신문, 약 4억 부가 발행되고 사람들이 얻는 뉴스의 85%는 신문이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의 지적대로 신문의 죽음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1990년대 중반 70%에 육박하던 한국의 신문 구독률이 2008년 현재 겨우 37%에 불과하다고 한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일본은 인구 1천 명당 630부의 신문을 구독하지만 우리는 200부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다.
오늘은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일을 기념해 제정한 제53회 '신문의 날'이다. 전파매체와 뉴미디어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갈수록 위축되고 있는 인쇄매체가 나아갈 방향을 짚어보는 날인 것이다. 자연히 화두는 '신문의 위기'다. 또한 신문의 위기는 전 세계적이다.
위기의 근원에는 신문의 신뢰 위기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신문협회는 올해 신문의 날 표어로 '신문을 내곁에 세상을 내품에'로 정했다. 독자들이 신문을 가까이 두고 읽으면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함이다. 역설적으로 신문이 독자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신문이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런 신뢰 회복과 반성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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