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 잘 가요, 언덕(차인표 지음/살림 펴냄)

일제강점기 무대로 한 '소설가 차인표'의 첫 장편소설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용이는 아버지 황 포수와 함께 백호를 찾아 백두대간을 헤매는 중이다. 4년 전 흰 호랑이가 나타나 엄마와 세상에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여동생을 물어갔기 때문이다. 백호가 엄마와 여동생을 물고 가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총을 쏘았지만 맞히지 못했다.

백호에게 복수하기 위해 전국 산을 헤매던 용이와 황 포수는 백두산 자락에 자리잡은 '호랑이 마을'에 들어왔다. 이 마을에는 순이라는 마음씨 고운 소녀가 살고 있다. 늘 코를 흘려 동네 아이들 사이에서 '훌쩍이'라고 불리는 착한 아이도 있다. 용이와 순이, '훌쩍이'는 친구가 된다.

순이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중국으로 가는 길에 호랑이 마을에 잠시 들린 심마니 부부는 갓난아기를 남겨놓고 떠났다. 갓난아기를 데리고 험한 산을 넘을 수 없었고, 중국에서 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순이는 부모가 버린 그 아이를 혼자 키웠다. 아기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순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아기의 두 눈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눈 주위를 풀어주었다. 눈 주위를 누를 때마다 아기는 소스라치듯 울어댔다. 순이는 우는 아기가 안쓰러웠지만 하루에도 몇번씩 눈물샘 주위를 눌러 주었다.

일본군 장교 가즈오는 조선인들을 계몽하고,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조선으로 왔다. 천황에 대한 충성심과 목적의식으로 무장해 군인이 됐던 가즈오는 조선에 도착한 후 자신들의 일이란 게 남의 땅에 허락 없이 들어가 싸움을 걸고, 짓밟는 짓임을 알았다. 그는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의 길과 양심에 따르려는 인간의 길 사이에서 갈등했다. 가즈오는 착하고 아름다운 조선 아가씨 순이를 사랑했다. 그가 물었다.

"순이씨는 어떤 이름으로 죽고 싶어요?"

"전 엄마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어요. 한 아이가 아닌 여러 아이들의 엄마, 아이들이 울 때 업어주고, 아플 때 만져주고, 슬플 때 안아주고, 배고플 때 먹여주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평생 살다가 아이들과 헤어질 때쯤 되면 아이들도 엄마라는 이름을 갖게 되겠죠."

상부에서 '처녀를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호랑이 마을의 징발대상자는 순이였다. 가즈오는 징발명령을 받고 고민한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천둥과 번개, 비바람에 호랑이 마을은 공포에 떨었다. 천둥소리는 살갗을 찢고, 영혼을 짓밟는 듯했다. 비는 밤새 내렸다. 날이 밝았고 비가 그쳤을 때 마을 논의 벼는 모두 넘어져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황금빛 고개를 꼿꼿이 들고 있던 벼들이 송장처럼 쓰러져 진흙 밭에 처박혀 있었다. 추수를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 논에서 나오는 쌀은 호랑이 마을 사람들이 일 년 동안 먹을 양식이었다. 농사를 망친 것이다. (생명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망연자실한 마을 사람들은 한숨을 내쉴 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늙은 일본군인 아쯔이가 묵묵히 군화를 벗고 조심스럽게 논바닥으로 걸어간다. 그는 징집되기 전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이다. 아쯔이는 벼를 조심조심 살펴보다가 한 포기를 일으켜 세운다. 진흙을 털어 내던 아쯔이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어린 아이처럼 큰소리로 외친다.

"이거 살아 있습니다. 아직 벼이삭이 꺾이지는 않았어요."

사람들이 하나 둘 논으로 뛰어든다. 호랑이 마을 주민들과 일본군은 힘을 합쳐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고, 진흙을 털어 낸다. 진흙범벅이 된 사람들은 이제 누가 마을 주민이고 누가 일본 병사인지 구분할 수 없다. 논바닥에는 일본군도 호랑이 마을 사람도 없다. 그냥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생명이 끊어진 줄 알았던 논에 다시 생기가 돌고, 나락은 알차게 익을 것이다. (이 부분은 이 소설의 압권이다.)

700부대 다케모노 중좌가 징발을 독려하기 위해 '호랑이 마을'에 왔다. 그는 진흙투성이가 된 일본 병사들의 몰골에 분노한다. 다케모노는 가즈오의 따귀를 때리고 계급장을 떼버린다. 가즈오의 지휘권을 박탈한 것이다. 지휘는 다케모노 중좌가 직접 한다.

순이는 일본군에 끌려간다. 순이를 보낼 수 없다며 저항하던 훌쩍이는 총살됐다. 정신대로 보내질 여자들이 백두산 너머의 일본군 진지에 갇힌다.

백호를 찾아 호랑이 마을을 떠났던 용이가 청년이 돼 돌아온다. 용이는 어머니와 동생의 복수를 다짐했듯, 친구 훌쩍이와 순이의 복수를 맹세한다. 가즈오는 고향의 어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쓴다.

'내 조국의 헛된 욕망 때문에 희생된 수백만 명의 생명 중, 최소한 한 생명에게라도 사죄할 것입니다. (오래 전) 어머니가 쳐내지 않고 살려준 그 마른 나뭇가지에서 복숭아가 수없이 많이 열렸듯, 제가 살리는 그 한 생명으로부터 우리 일본이 해친 것만큼의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용이와 가즈오는 각자 복수와 사죄, 사랑의 이름으로 순이 구출작전에 나선다.

영화배우 차인표씨가 쓴 장편소설 '잘가요, 언덕'의 줄거리다. 소설은 복수로 시작하지만 결국 용서와 사랑, 생명에 관한 이야기다. 쓰러진 나락 일으켜 세우기, 정신대로 끌려가는 순이 구하기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생명사랑'임을 보여준다.

홍보를 위해 신문사 문화부로 배달되는 책은 일주일에 200권쯤 된다. 차인표의 장편소설 '잘가요, 언덕'도 그 중 한 권이었다.

'흥, 유명세를 업고 책 한 권 냈다, 이거지?' 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꼬투리를 잡고 싶은 마음'으로 읽었다. 몇 장을 읽으면서 그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서사를 갖춘 흥미로운 이야기, 뛰어난 상징과 문학적 장치는 그가 초보작가인가 의심스러웠다.

생명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작가의 사랑은 애틋하고 아름답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운 이야기 전개는 작가 차인표가 겉치레나 거드름 피우지 않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작가는 "10여년 전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저는 파렴치한 사람들(일제)의 범죄를 알리고 죄인들을 골탕 먹여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글을 쓰면서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할머니들이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황순원의 '소나기',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 역시 좋아할 듯 하다. 231쪽, 1만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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